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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온 생애를 우리말에 빚지고 있는 사람”

기사승인 2020.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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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지용의 사람이야기-6. 정도상 소설가·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 상임부이사장

   

얼마 전 휴일에 불쑥 정도상 작가를 찾아갔다. 익산시 변두리에 있는 그의 집에서 마당의 잔디를 깎고 있었다. 6년 전 그가 익산에 터를 잡으면서 이 집을 고른 것은 순전히 ‘볕’ 때문이었다. 서울을 떠나겠다고 마음먹은 후 알아보던 중에 이 집을 소개받았다. 고칠 데 많은 낡은 집이었지만, 마당 가득 들어오는 볕이 너무 좋았단다.

그는 지리산 백무동 언저리에 있는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자식들을 데리고 서울로 이사했다. 사당동의 달동네에서 살았다. 어머니가 이런저런 허드렛일을 하는 것만으로 다섯 식구가 먹고살기 힘들었다. 동생들을 데리고 나가서 껌팔이, 신문팔이를 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구멍가게에서 쌀 한 봉지와 연탄 두 장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중학교 때부터는 방학 때마다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했다. 새벽 잠결에 빗소리가 들리면 반가웠다. ‘아, 오늘은 일 안 나가도 되겠구나’

고단한 노동으로 가족의 생계를 감당하면서도 틈만 나면 책을 읽었다. 아예 학교 수업을 빼먹고 도서관에 가는 날도 많았다. 그렇게 책 속에 빠져 살면서 수백 권의 고전들과 시집들을 읽었다. 학교공부는 뒷전이었으니 대학입시에 두 번이나 낙방한 것이 당연했다.

전북, 젊은 날 맺은 인연

삼수 끝에 전북대학교에 합격한 것이 1981년이었다. 그런데 면접시험을 보는 날이 하필 군 입대 날이었다. 어쩔 수 없이 입대 당일에 면접시험을 보러 갔다. 며칠 후 뒤늦게 논산훈련소에 찾아갔더니 입대 날짜를 어기고 지각 입소한 신병들만 따로 모아놓은 일명 ‘또라이 중대’로 보냈다. 걸핏하면 기합을 받는 중대였다. 그가 훈련소에 있는 동안에 가족들이 대학 입학금을 내고 휴학처리를 해주어 입학은 할 수 있었다.

군 생활을 하는 동안 ‘강제징집’당한 병사들을 만났다. 전두환 정권은 민주화운동에 가담한 대학생들을 강제로 군에 입대시켰었다. 그의 부대에도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하다가 강제로 징집되어 온 학생들이 여럿 있었다. 그들과 함께 비밀 독서모임을 만들어 사회과학 책들을 읽고 토론했다. 책들은 땅을 파고 묻어서 숨겼다.

군 생활을 마치고 1984년 학교로 돌아왔다. 말이 복학이지 달랑 면접시험만 치른 후 바로 군대에 다녀왔으니 ‘나이 먹은 신입생’인 셈이었다. 학과도 자신의 뜻과 달리 독문과였다. 국문과 공부를 해서 시인이 되고 싶었는데, 당시에는 계열별 모집이라서 일단 어문계열을 지망한 후 군에 입대했었다. 본인이 없으니 학교 측에서 임의로 독문과에 배정했던 것이다. 본의 아니게 독문과 복학생이 된 그는 날마다 국문과에 가서 수업을 받았다.

그 시절에 이재규라는 후배를 만났다. 법대생이었던 이재규도 법대 수업에는 별 관심이 없고 날마다 인문대 벤치에 와서 노는 문학청년이었다. 그렇게 의기투합한 둘은 후배들을 모아 문학동아리를 만들었다. 그런데 동아리의 지향이 ‘민족해방문학’이다보니 동아리는 자연스럽게 ‘운동권 조직’으로 발전해갔고, 그는 전북대 학생운동의 리더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결국 1986년 11월에 구속되어 이듬해 봄까지 징역살이를 했다.

민족문학계의 아이돌

1987년 봄 감옥을 나온 후 아파트 공사장에서 공사 현장 자재를 지키는 야간경비로 일하고 있었다. 전남대에서 공모하는 ‘5월 문학상’ 상금이 30만원이라는 얘기를 후배에게서 듣고 응모했다. 한평생 가난에 짓눌려 살아온 어머니께 ‘글 쓰는 것도 돈이 된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감옥에서 만났던 공수부대 출신 사형수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해서 쓴 단편소설 ‘십오방 이야기’로 5월 문학상을 받았다.

이후 군 강제징집 후 의문사한 대학생의 이야기 ‘친구는 멀리 갔어도’, 우리나라 ‘고아 수출’ 문제를 다룬 ‘아메리칸 드림’ 등을 잇달아 발표했다. 미국으로 입양된 고아들 중 일부가 불법 장기이식의 희생자가 된다는 것을 고발한 ‘아메리칸 드림’은 큰 파장을 불러왔다. 유명한 해외입양전문기관이 발칵 뒤집혔다고 한다. 그는 일약 주목받는 신인으로 자리 잡았다. 강연요청과 출간제의가 밀려들었으니 요즘말로 하면 ‘아이돌’ 비슷했다.

그의 소설 중에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도 있었다. ‘열아홉의 절망 끝에 부르는 하나의 사랑노래’라는 장편이었다. 소설 출간 당시 7만 부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였는데, 영화로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그 당시에 아내가 첫아이를 임신 중이었지만 결혼식을 치를 형편이 못 됐었는데, 이 소설의 인세와 영화 판권료 덕분에 결혼식을 할 수 있었다.

지워지지 않는 아픔

그는 뜻밖의 아픔을 겪었다. 2005년에 당시에 중학생이었던 아들을 잃었다. 그가 몽골여행을 다녀온 직후였다. 오래 전 흉노족이 고비사막에 남긴 암각화를 보면서 언젠가 아들과 함께 다시 오고 싶었다. 암각화의 사진을 찍어 와서 아들에게 보여주니 꼭 아빠랑 함께 가서 보고 싶다고 했다. 그랬던 아들이 갑작스레 세상을 등진 것이다.

부모를 여의는 것은 하늘이 무너지는 ‘천붕(天崩)’이고, 자식을 잃으면 창자가 끊어지는 ‘단장(斷腸)’의 아픔을 느낀다고 했다. 아들이 달리는 지하철에 뛰어들었기에, 그는 오랫동안 지하철을 탈 수 없었다. 15년이나 지난 지금도 결코 지워지지 않는 아픔이다. “하루 종일 슬픈 게 아냐. 그냥 남들처럼 평범한 일상을 살다가 문득 어느 순간에 생각이 나면 가슴을 도려내는 것처럼 아픈 거지.”

그는 아들과의 약속을 지켰다. 아들의 영혼을 보듬고 다시 몽골에 가서 암각화를 보여주었다. 그렇게 몽골에 다녀와서 쓴 소설이 ‘낙타’였다. 책의 첫머리에 그는 “이 소설을 지상의 모든 부모와 자식들에게, 그리고 상처받은 모든 이들에게 바칩니다.”라고 썼다. 아들이 생전에 꼭 써보라고 했던 탈북민 이야기도 ‘찔레꽃’이라는 연작소설로 냈다. 그가 쓴 동화 ‘돌고래 파치노’ 역시 아들을 위해 쓴 책이다.

겨레말큰사전

그는 일찍부터 남북 사회문화교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왔다. 그러던 중에 고 문익환 목사님의 방북기를 읽다가 “북한에 가서 김일성 주석을 만났을 때 남북공동 국어사전 편찬을 제안해서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다.”는 대목을 발견했다. 이후 그는 북측 관계자들을 만날 때마다 문익환 목사님과 김일성 주석의 약속을 꼭 실현시켜야 한다고 설득했다.

오랜 설득 끝에 결국 2005년에 금강산에서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 편찬위원회’ 결성식이 열렸다. 남쪽에서는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법’이 국회를 통과해서 남북교류협력기금을 지원받는 법인이 설립되었다. 애초에 이 사업을 제안하고 주도해왔던 그가 상임이사를 맡아 의욕적으로 사업을 벌여나갔다. 남북한은 물론이고 중국의 조선족과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사할린 동포들까지 아울러서 우리말을 집대성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얼마 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사업은 벽에 부딪혔다. 예산 삭감은 물론이고 상임이사인 그와 이재규 사무처장에 대해 노골적으로 사임을 요구했다. 결국 사무처장이 먼저 사임했고 그 역시 얼마 후 상임이사직에서 해임되었다.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을 거치는 동안 겨레말큰사전 사업은 크게 위축되었고 편찬사업회는 겨우 명맥만 유지했다.

2017년 정권교체 이후 그는 상임이사로 복귀했고 얼마 전부터는 부이사장 직을 맡고 있다. 매일 아침 여섯시에 익산역에서 KTX를 타고 서울로 출근한다. 내년까지 ‘겨레말큰사전’을 펴내는 것이 목표다. 종이사전을 출간한 후에는 전자사전을 구축하고 남북한이 함께 쓸 수 있는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도 만들 계획이다.

작가가 글만 쓰면 되지 왜 그렇게 사서 고생이냐고 물었다. “작가니까 이러는 거지. 작가는 한평생 우리말에 기대서 먹고 사는 사람이잖아. 그럼 우리말에 진 빚을 갚아야지.”
/윤지용(도서출판기억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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