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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를 이야기한 윤동주를 만나다

기사승인 2020.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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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수진의 영화 속 전라북도-5. <동주> 촬영지 남원 서도역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 얼굴에 와닿는 바람의 결이 좋은 계절이다. 어디론가 떠나야만 할 것 같은 가을날이다. 머릿속에 가을날과 여행을 나란히 놓고 보니 자연스레 기차역이 떠오른다.

기왕이면 코스모스가 한들거리는 기차역이라면 더 좋겠다. 그렇게 실제 떠날 수는 없지만, 떠나는 설렘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가을날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곳, 남원 서도역으로. 어찌 보면 주객이 전도된 게다. 영화를 떠올리고, 영화 속 장소를 찾아 떠난 게 아니라, 장소를 먼저 떠올리고 영화를 떠올렸으니 말이다.

머리가 아닌, 마음이 먼저 움직인 거라 해두자. ‘가을이라서, 가을이니까’하고 애꿎은 가을 탓을 해본다. 가을의 감성에 흠뻑 젖어 오랜만에 다시 본 영화 <동주> 이야기다. 어쩌면 아예 생뚱맞진 않은 것도 같다. 올해는 시인 윤동주의 서거 75주기인 해다.

그래서 올 초 <동주>의 특별상영회도 열렸다. 게다가 가을만큼 시가 어울리는 계절이 어디 있겠는가. 시인 윤동주를 만나기 좋은 참 좋은 계절 아닌가. 사실 <동주>에 등장한 곳은 서도역이 아닌, 서도역 옆에 자리한 역장의 관사다. 이 관사는 영화에서 윤동주의 하숙집으로 등장했다. 이 역시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실상 촬영한 곳은 관사인데 그보다 <동주> 하면 서도역을 먼저 떠올리니 말이다. 그런데 또 그게 무슨 상관인가. 관사에서 영화의 감동을 다시 떠올리고, 서도역에서 가을을 즐기면 그만인 것을.

요즘 ‘대세 배우’ 의 연기력에 빠지다
영화 <동주>는 흥행과 평단의 반응 모두 준수한 성적을 기록한 영화다. 화려한 볼거리가 있는 영화는 아니지만, 글과 연출, 그리고 연기의 삼박자가 잘 어우러져 좋은 결과를 만들었다. 2016년 개봉 후 제52회 백상예술대상 영화 대상, 제25회 부일영화상 최우수 감독상, 제37회 청룡영화상 각본상, 신인 남우상 수상이 그 결과다. 이러한 수상 이력을 차치하고도 영화를 봐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요즘 가장 잘 나간다 해도 과언이 아닌 배우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윤동주 역의 강하늘과 송몽규 역의 박정민은 그야말로 대세 배우다. 이 두 배우는 어쩌면 4년 전 영화 속 모습과 같은 캐릭터로 자신만의 영역을 단단히 구축하고 있다.

순정남 그 자체로 분해 <동주>의 윤동주처럼 잔잔하면서도 강단 있는 연기로 큰 인기를 끈 강하늘. 머리와 가슴이 시키는 일에 망설임 없었던 송몽규처럼 개성 강하고 반항기 어린 연기로 주목받고 있는 박정민. 영화 <동주>는 어쩌면 이 두 배우의 현재 연기하는 모습의 출발점과도 같은 영화다.

영화를 보는 내내 대세 배우들이 현재와 비슷한 캐릭터를 어떻게 소화해냈는지 보는 즐거움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순수한 윤동주의 모습에서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순정남 황용식이 떠올랐고, 반항기 가득한 송몽규를 보며 영화 <변산>의 학수와 <시동>의 택일이 스치는 즐거움 말이다. 두 배우의 연기는 고착화 된 모습이 아니라, 몸에 잘 맞는 옷을 입은 느낌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런 연기만 잘하는구나’가 아닌, ‘역시 이런 연기를 참 잘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스토리와 연출이 중요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영화의 꽃은 배우 아니던가. 그런 면에서 영화 <동주>는 참 볼 만하다.

서글픈 시대에 맞선 빛나는 미완의 청춘 이야기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우리의 서글픈 역사, 일제강점기. 영화 <동주>는 그 시절 한집에서 태어나 친구처럼 자란 동갑내기 사촌지간이 각자의 방식으로 시대에 맞서는 이야기다. 그들은 동주(강하늘 분)와 몽규(박정민 분). 시인을 꿈꾸는 동주에게 자신의 신념을 위해 거침없이 행동하는 몽규는 가장 가까운 벗이자, 커다란 산 같은 존재다. 몽규는 동주가 그토록 바라는 신춘문예에도 단번에 당선되고, 교토제국대학에도 홀로 합격한다. 그런 몽규를 보며 동주는 자괴감을 느끼고 갈등의 골이 깊어진다. 몽규가 동주를 보호하기 위해 한 행동들을 동주는 오해하게 되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슬픈 시대를 살아낸다.

평생을 함께한 친구이자, 영원한 라이벌이었던 윤동주와 송몽규의 성격은 영화 시작과 함께 드러난다. 신앙과 사회주의 평등에 대해 마을 사람들끼리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며 나누는 동주와 몽규의 대화가 그것이다. “세상이 변하고 있잖니?”라고 말하는 송몽규에게 “세상이 변해도 신앙은 변하지 않아”라 답하는 윤동주. 행동이 앞서는 송몽규와 신념이 먼저인 윤동주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영화는 그 대사처럼 극명하게 다른 모습의 두 주인공의 모습이 그려진다. 생각대로 거침없이 행동하는 몽규와 앞서서 이끌진 않지만,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동주. 그리고 어쩌면 영화의 주제와도 같은, 잊히지 않는 동주와 정지용 시인의 대화. 일본으로 가라는 정지용 시인의 권유에 동주는 창씨개명을 하면서까지 유학을 가야할지 모르겠다.

그렇게까지 해서 유학을 간다는 게 왠지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정지용 시인의 말. “부끄러움을 아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부끄러운 걸 모르는 놈들이 부끄러운 거지.” 영화 말미, 동주는 여전히 부끄럽다 말한다. “이런 세상에 태어나서 시를 쓰기를 바라고, 시인이 되기를 원했던 게 너무 부끄럽고, 앞장서지 못하고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기만 한 게 부끄럽다”고 말이다. 그리고 끝내 신념을 지키고 거짓 자백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한다. 조용하지만 강단 있는 모습 자체였다. 그 모습에서 행동이 앞서지 않는다고 행동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됐다.

동주의 하숙집으로 나온 서도역 역장 관사
남원시 사매면에 자리한 옛 서도역은 1934년 지어진 목조 역이다. 역 앞에는 ‘구 서도역 영상촬영장’이라는 푯말이 세워져 있다. 역에 들어가니 아름드리나무가 눈에 띈다. 흐드러진 나뭇가지에 걸려 아스라이 보이는 역의 모습이 아련하다. 역 뒤로 돌아가니 기찻길 옆으로 흐드러진 코스모스가 반긴다. 이 모습을 보기 위해 달려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차가 서지 않는 간이역에 흐드러지게 핀 코스모스는 쓸쓸한 역에 온기를 불어넣는다.

서도역은 1931년 전라선(당시 경전북부선) 전주~남원 구간 개통 때 문을 열었다. 남원시에 따르면 역사는 그 이듬해인 1932년 지어졌다고 한다. 흑백 영화 <동주>를 본 탓일까? 플랫폼 건너편에 서서 오래된 목조 건물을 보니 어느새 색이 지워진다.

역에서 나와 왼쪽으로 조금 가면 역장 관사가 나온다. 바로 현재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대에 진학한 동주와 몽규의 하숙집으로 등장한다. 1930년대 일본식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역장 관사는 일제강점기 하숙집 모습 그 자체였다. 그런데 역장 관사는 아쉽게도 공사 중이라, 그 내부를 살펴볼 수 없었다. 11월 말 준공 예정이라고 하니 올해가 가기 전에 다시 찾을 이유가 생겼다. 그때는 코스모스 대신 눈 쌓인 서도역을 거닐고 와야겠다.
/글·사진 최수진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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