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혁명 횃불로부터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에 이르기까지 이 땅은 분노와 울분의 세월로 얼룩져있다. 그런 시대를 살면서 울지도 분노하지도 못하는 바보같이 착한 여인 정월.
  4살 때 황토현에서 일본군이 쏜 총탄 파편을 머리에 맞은 정월은 그후로 어찌 된 일인지 아무리 울려고 해도, 화를 내려고 해도, 눈물을 흘리거나 분노를 표출하지 못한다. 대신 달님이 어두운 세월을 다시 밝히리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고난을 견디며 묵묵히 파란만장한 세월을 넘긴다. 속울음을 삼키고 분노를 삭이면서 끝내 살아남아 기나긴 어둠을 물리치는 정월이 대놓고 상징하는 것은 바로 우리민족이다.
  지난 7월 정읍시립국악단이 마련한 기획공연 ‘정읍사는 착한 여인’(연출 주호종·작가 사성구)은 새로 부르는 희망가였다. 초연 이후 100여일 만인 오는 10월 26일 국립민속국악원이 기획한 ‘2019 대한민국 판놀음’에 초청돼 다시 무대에서 펼쳐질 정월의 이야기.
  입단 한 달도 채 안 돼 주인공 정월 역을 맡아 기대이상으로 소화해 냈던 젊은 소리꾼 김유빈(25)을 만났다.

  김유빈은 지난 6월 3일 정읍시립국악단에 첫 출근했다. 입단 후 첫 역할이 여자 주인공. 그 자신도 놀랐다.
  “대본을 처음 받아 읽으면서 정월은 소화하기 쉽지 않은 복잡한 캐릭터라고 느꼈어요. 원치 않는 결혼에다 딴 여자가 낳은 아들을 키워서 징병 보내고, 자신도 다리에 장애를 입고 장님이 돼서 돌아 온 아들을 업고 가는, 정월의 일생이 마치 대하드라마 같다는 생각이었어요. 당연히 노련한 선생님들이 맡을 줄 알았는데 저한테 맡겨진 거예요.”
  그는 인터뷰 내내 선배 단원을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에게는 모두가 선생님이었다.
  전주마당창극 ‘아나옜다 배갈라라’ 토끼역, ‘천하맹인이 눈을 뜬다’ 심청역, ‘변사또 생일잔치’ 춘향역 등을 맡으며 주목을 받았던 그이지만 20대 중반 공립단체의 단원으로서는 모든 게 조심스러웠다. 마당창극은 출연자 수도 적고 나이가 비슷한 출연진 많아 편한(?)구석이 있었다면 ‘정읍사는 착한 여자’는 출연자 수도 많을 뿐더러 무대에 서는 사람들이 직장 동료이고 선생님이라는 무게감이 달랐다.
  “제가 부족하면 동료이자 선생님들에게 폐가 되는 상황이 생길 것 같아 열심히 했어요, 연습 많이 하고 선생님 말씀 잘 따르는 것. 이 두 가지는 지키려 노력했어요.”
  7살이란 어린 나이에 소리공부를 시작한 그는 이미 전북대학교 한국음악과 2학년이던 2014년, 그리고 졸업반이던 2016년, 춘향가와 수궁가를 완창했다.
  “저는 완창발표회를 제 자신에게 숙제처럼 던졌어요. 발표회 날을 정해 놓아 소리공부를 집중적으로 할 수 밖에 없는 구조를 만드는 거지요. 선생님(박영순)으로부터는 칭찬보다 꾸중을 더 많이 들어요. ‘아직 멀었다’ ‘더 열심히 해라’는 채찍이죠.”
  장점을 묻자 먼저 보완할 점이 많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소리만 할 때와 창극 안에서 연기와 소리를 같이 할 때 스스로 생각하기에 차이가 있다고 한다. 이유는 ‘소리 공부가 부족해서’. 소리가 튼튼하게 밑받침이 돼야 창극에서도 제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토해내는 소리의 장점 가운데 하나는 ‘정확한 가사 전달’이다. 꼭꼭 씹어서 말하는 습관이 ‘소리에 힘이 들어간다’는 단점으로 지적받기도 하지만 관객들 입장에서는 사설의 내용을 쉽게 이해 할 수 있는 공연이 되기도 한다.
  전북도립국악원 조통달 단장과 박영순 수석에게 소리를 배운 그는 이미 전주 대사습놀이 일반부 차상. 춘향제 일반부 종합대상을 받아 실력을 인정받은 소리꾼이다. 스승의 뒤를 잇고 싶다.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대통령상 수상은 어렵기는 하지만 반드시 도전하고픈 목표다.
  그런 그가 올 가을 다시 한 번 바보같이 착한 여인 정월이 된다.
  “지난 7월 두 번째 공연을 마치고 울었어요. 제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공연이었어요. 무대에서의 작은 실수도 있었고, 다시는 만회할 기회도 없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많았어요. 그런데 10월 공연이 잡힌 거예요. 더 열심히 하라고. 다음 달 공연 기대해 주세요.”
/이병재기자·kanada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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