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동 희 (예원예술대학교 교수, 前 전주역사박물관장)

김종직은 재능과 학문이 뛰어난 영남사림의 종조(宗祖)로 조선초 사림파의 핵심 인물이다. 그는 성종 18년(1487) 전라감사에 임용되어 이듬해 체직되었다. 연산군 때 그가 지은 「조의제문」이 문제가 되어 무오사화가 발발, 그와 그의 문인들을 비롯한 사림들이 대거 희생되었다.

▶선산의 토호 집안으로 아버지 때 밀양으로 이주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본관은 선산, 자는 효관(孝?)ㆍ계온(季?), 호는 점필재(?畢齋)이며 밀양 출신이다. 아버지는 태종대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 사예(司藝) 벼슬을 지낸 김숙자(金叔滋)이다. 김숙자는 길재의 문인으로 김종직의 아버지이자 스승이다.
그의 가문은 고려말 선산의 토호에서 성장한 세력으로, 아버지 김숙자가 밀양의 사재감정(司宰監正) 박홍신(朴弘信)의 딸과 혼인하면서 처가인 밀양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그러면서 경제적 기반을 갖추고 중앙관계에 진출하였다고 한다. 김숙자는 첫 번째 부인과 사별하고 밀양박씨와 재혼하였다. 
김종직은 밀양박씨 소생 3남 2녀 중 막내로 밀양에서 태어나고 살았다. 밀양 부북면 제대리 한골마을이 그 출신지이다. 그의 묘소도 이 마을 추원재 뒷산에 있다.
김종직의 부인은 금산(金山, 현 김천)의 창녕조씨 울진현령 조계문(曺繼文)의 딸이다. 조씨부인은 그의 문인인 조위(曺偉)의 누나이기도 하다. 그는 처가인 금산으로 낙향하여 생활하기도 하였다.

김종직은 55세 때 조씨부인과 사별하고, 3년상을 치른후 18살의 남평문씨 사복시정(司僕寺正) 문극정의 딸과 재혼하였는데, 가문의 대를 이은 김숭년(金嵩年)은 문씨부인 소생이다. 김종직은 5남 3녀를 두었는데 네 아들은 일찍 죽었다.
김종직 집안은 무오사화 때 화를 입고 경남 합천 야로에 이주해 살다가 5대손 김수휘가 경북 고령 쌍림면 양천 최씨와 혼인하면서 개실마을(가곡마을, 꽃이 피는 아름다운 골)로 들어와 살았다. 개실마을은 일선김씨(선산김씨) 집성촌으로 김종직 종택이 이 동네에 있다. 이 종택에 김종직이 살았던 것은 아니다.

▶세조대 과거 급제, 함양군수ㆍ전라감사 역임
김종직은 단종 1년 진사가 되고, 세조 5년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는 「조의제문」을 지어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하고 절의를 중시한 도학자로서 높이 존중되는데, 그가 과거 시험에 급제해 벼슬길에 오른 것이 세조 때이다. 그의 형 김종석도 세조 2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는 성종대 함양군수로 부임하여 관영 차밭을 일구었다. 함양은 선비의 고장으로 정자가 즐비하고 최치원이 조성한 상림(上林)이 있는 곳이다. 이곳 함양에 차밭을 만든 이가 김종직이다. 나라에 바치는 차가 함양에서 생산되지 않아 전라도에서 사오자 엄천사(嚴川寺) 인근에 관에서 운영하는 차밭을 만들어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관영 차밭 조성터에 기념비가 서 있다.

차를 즐기고 선비정신이 투철했던 한재(寒齋) 이목(李穆)이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목은 다유(茶儒)로 차학의 경전같은 ‘다부(茶賦)’를 지었으며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한재는 전주출신 개국공신 이백유의 현손으로 황강서원에 배향되었다.

김종직은 이후 선산부사를 지내는데 가까이서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성종의 총애를 입고 도승지, 이조참판, 홍문관제학, 경기도관찰사 겸 개성유수 등을 지내고 성종 18년(1487) 5월 전라도관찰사에 제수되었다. 전주부윤을 겸했다고 하나 그러지는 않은 것 같다. 『호남도선생안』에 관찰사로만 나온다. 이듬해 5월 한성부 좌윤으로 체직되어 상경하였다.

그는 향촌자치를 주장하는 사림으로서 전라감사로 부임해 풍속교화에 힘썼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가 전라감사로 올린 상소에서, ‘전라도에 도둑이 많은 것은 장문(場門)이 있기 때문이니 이를 폐하자고 하였으며, 전라도가 음사(淫祀)를 숭상하는데 나주가 제일 심하다고 하면서 이를 폐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의 전라감사 재임시 법성포 조운선 31척이 난파되고 조군(漕軍)들이 익사하는 일도 있었다.
전라감사 역임후, 공조참판, 병조참판 등을 거쳐 형조판서에 올랐다. 성종 23년(1492)에 62세에 졸하였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조의제문」
성종이 승하하고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실록청 당상관 이극돈이 김일손의 사초에서 김종직이 찬한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발견하였다. 「조의제문」은 초나라 항우가 회왕 의제를 물에 빠뜨려 죽인 것을 빗대어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글이다.

『연산군일기』에 그 내용이 실려 있다. “꿈속에 신선이 나타나서 ‘나는 초 회왕(의제)인데 초패왕 항우에게 살해되어 빈 강에 버려졌다.’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 아마 항우가 사람을 시켜서 회왕을 죽이고 시체를 강물에 버린 것인지 알 수 없다. 이제야 글을 지어 의제를 조문한다.”고 하였다. 김일손의 사초에 노산군 단종의 시신이 물에 던져졌다는 말이 나온다.

이극돈은 유자광과 손잡고 김종직의 후예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있을 때 학사루(學士樓)에 걸려있는, 유자광이 경상감사로 재임시 지은 시 현판을 떼어내 묵은 감정이 있었다고 한다. 
「조의제문」으로 무오사화가 일어나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했고, 그 제자들이 막대한 희생을 치러야 했다. 부관참시란 죽은자의 목을 베는 것이다. 그의 제자로 사초에 이를 수록한 김일손은 사사(賜死)되었고, 정여창은 유배후 배지에서 죽었으며, 김굉필은 유배되었다가 갑자사화 때 사사되었다.

이극돈은 문제의 사초를 바로 고하지 않았다고 하여 파직되었다. 이때 유순(柳洵)도 이 사초를 바로 보고하지 않았다고 하여 파직되었다. 유순은 성종 14년에 전라감사를 지내고 영의정에 올랐던 인물로, 연산군 8년에 시문에 능한 10인에 선발되어 시수상(詩首相)이라는 칭찬을 들었으며, 『완산지』 경기전조에 그가 찬한 시가 실려 있다.

▶영남사림의 종조로 조선초 사림파의 영수
조선 유학의 도통은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진다. 길재가 역성혁명에 반대하여 고향 선산으로 내려와 김숙자를 비롯해 후학을 양성하였다. 김숙자는 김종직의 아버지이자 스승으로 길재의 학통을 아들 김종직에게 물려 주었다.

김종직은 체구가 작았으나 학문과 문장에 뛰어나고 절의를 숭상해 많은 사람들의 존중을 받았다. 김종직의 3대 제자가 연산군 사화 때 희생된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이며, 김굉필의 제자가 바로 조광조이다. 그런데 김굉필이 스승 김종직을 ‘훈구파와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고 성리학이 아니라 문장에만 치중한다.’라고 비판하여 결별하였다고 한다.

김종직은 중종반정이 일어나 신원 복권되었고, 임난후 무너진 질서를 바로 세우고, 조선초와 달리 단종을 복위하는 등 가치 체제를 새롭게 재편하려 하였던 숙종 때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향교 문묘에 동방 18현으로 그의 제자 김굉필과 정여창, 손제자 조광조 등은 배향되어 있는데 김종직은 문묘에 배향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그가 문장에 능했으나 성리학의 도를 깊게 닦지 않았다든지, 「조의제문」을 찬했지만 세조대에 벼슬한 것 등이 문제가 되었다는 견해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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