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을 그리듯이/연꽃들을 피우듯이//금빛으로 은빛으로/밝혀놓은 이 말씀들//옴 몸으로 온 맘으로/염송하고 염송하면//내 말 되어 울려오네/내 맘 되어 밝아오네//이 말마저 없는 자리/이 맘마저 없는 자리//나마저도 없는 자리/나 모르게 가게 하네”(박석구 ‘사경송’ 외길 김경호님의 국가 무형문화재에 지정됨을 축하하며)

지난해 사경이 국가무형문화재 종목으로 지정된 이후 1호 보유자가 된 다길 김경호가 전주에 자리를 잡았다.

32년간의 서울 생활을 마치고 귀향한 김경호는 한국전통사경연구원 본원을 전주에 두고 사경 전승과 후학 양성에 나선다.  

그 첫 번째 걸음으로 국가무형문화재 제141호 사경장 보유자 인정 회향전을 12일부터 24일까지 전북예술회관 차오름 1실에서 연다.

이번 전시는 국립무형유산원이 무형유산의 대중화와 보전·전승 활성화를 목적으로 하는 국가무형문화재 공개행사 일환이다.

사경은 부처님 가르침을 널리 전파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됐다. 부처님 말씀을 옮겨 쓰는 일을 통칭한다.

그렇다고 단순히 쓰는 일이 아니다. 사경은 ‘수양’과 ‘예술’의 성격을 같이 갖고 있다.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서경을 이렇게 표현했다.

“사경은 기본적으로 해서체로 서사하는 전통을 지니고 있고 전통예술, 특히 종교예술은 의궤성을 중시하므로 튼 병화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경전, 즉 성인의 진리의 말씀을 서사하면서 내면에 새기는 일이기 때문에 삼청(몸의 청정, 마음의 청정, 재료와 도구의 청정)을 추구하며 삼독심(탐욕,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삼매(집중을 통하여 마음이 고요해진 상태)를 추구한다. 그런 까닭에 ‘서도’라 할 수 있고, 역대 명필의 서법에 두고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서법’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와중에도 무한 변화를 추구하며 각각의 점획과 결구, 장법에서 개성을 드러내기 때문에 ‘서예’라 할 수 있다.”

서울에서 서예학원을 운영하며 후학을 양성하던 그는 1997년 제1회 불교사경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사경대회 국내 1호 상장을 받은 그는 본격적인 사경 공부에 들어갔다. 금산사 개산 1400주년 사경전을 열었고 2011년 전주세계비엔날레에서는 커미셔너로 사경전에 참여했다. 또한 뉴욕과 중국에서 한달 이상 장기 초대전을 갖기도 했다. 국가무형문화재 종목이 없던 2010년에는 노동부로부터 전통사경 기능전승자로 지정도 받았다.

또 국보 제35호 화엄사 4사자3층석탑 봉안사경 및 중수기 제작, 호국정토사 대웅전, 화엄사 금정암 무량수전 편액 휘호 등 많은 사찰과 민속문화재 휘호 등을 제작했다.

김제가 고향인 그는 이리남성고와 전북대 국문학과를 졸업했고 동국대에서 미술사학과 석사를 했다. 자신을 지도했던 박석구 시인과 최승범 시인을 지금도 은사로 깍듯이 모시고 있다.

그가 전북, 전주에 둥지를 미련한 이유는 또 있다.

“귀향을 고민할 때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의 금판경을 떠올렸다. 한국 최고의 금판경이 나온 그곳에서 사경의 맥을 이을까도 생각했지만 결국 전주세계비엔날레를 통해 세계적으로 ‘서’의 중심으로 인정받고 있는 전주에 자리를 잡게 됐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의 역작으로 손꼽히는 ‘감지금니 7층·5층 보탑(법화경 견보탑품)’을 영인본으로 만날 수 있다. 폭 7.5㎝ 길이 663㎝의 가대한 두루마리 사경이다. 신장도와 변상도, 그 다음에 5, 7층탑 463기를, 그리고 7층 탑신마다 한 글자씩 3,000자의 견보탑품 원문을 필획했다. 자그마치 하루 10시간 씩 8개월을 하루 같이 작업한 결과물이다. 붓끝의 한 두 개의 털로 0,1mm 의 획을 1mm의 공간에 5~10개를 긋는다. 글자 한자의 크기는 2~3mm이다. 변상도를 보면 1mm 크기의 부처 얼굴에는 두 눈과 코 입이 적확하게 필획된다.

김경호는 “이번 전시는 일반인에게 조금 생소한 사경의 의미와 가치를 공유하기 위한 자리”라며 “전주로 이사하면서 동시에 마련한 이번 전시를 마치면 50만자에 달하는 화엄 석경 복원 준비에 들어갈 계획이다”고 밝혔다.
/이병재기자·kanadasa@
 사진=11일 전북예술회관 전시 준비 중인 김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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