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화 (농촌진흥청)

오빠의 첫 기억은 다섯 살 때다. 고향에 있는 제주공항에서였다. 어머니와 함께 마중을 나갔다. 오빠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큰 키에 근육질 골격을 가진 오빠가 군복까지 입고 있었으니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3대 독자였다. 어머니는 아들인 오빠를 낳았다는 이유로 당당함과 약간의 거만까지 누릴 정도였다.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던 아버지는 매력이 없었다. 평소 말씀이 없었고 퇴근 후에는 책과 신문을 벗 삼아 살았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가 불만이었지만, 영특한 오빠는 자랑이었다. 게다가 어머니에게 살갑게 대하는 오빠는 듬직한 맏아들을 넘어 연인이며 삶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어느 아침이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아버지는 신문을 읽고 있었고 어머니는 갈치를 손질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전화를 받았는데, 몇 마디 말이 오가더니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는 오빠가 다쳤다며 털썩 주저앉았다. 어머니는 황급히 오빠를 향해 제주를 떠나간 뒤 반년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그동안 어머니는 많이 야위었고 사소한 일에도 신경질을 낼 정도로 성격이 변했다.

어머니가 돌아온 날 밤에 나는 가느다란 울음소리에 잠을 깼다. 어머니였다. 모두가 잠들은 밤에 남들 모르게 소리죽여 울고 있었다. 내게 어머니는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산이었는데 그런 모습은 나를 슬프게 했다.

오빠가 사고를 당했다. 어머니에게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오빠는 육사를 졸업하고 장교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척추를 다쳐 하반신 마비가 되었다. 회복이 불가능했다. 그런 오빠를 다시 걷게 하려고 어머니는 어디든 무엇이든 찾아다녔다.

몇 년이 지나서 오빠가 제주 고향집을 찾았다. 휠체어가 낯설었지만 내게 환하게 웃어 주었다. 나도 오빠 따라 그냥 웃었다. 오빠는 며칠 동안 집에 있었다. 집에 있는 내내 어머니는 귀한 음식을 해 주었다. 오빠도 어머니의 마음을 아는지 맛있게 먹었다. 며칠 뒤 오빠는 서울로 갔다. 그 후 제주에 다시 오지 못했다. 어머니는 육지 하늘을 향해 멍하니 계실 때가 많았다. 세월이 흘러 내가 어머니의 자리에 서고 보니, 아픈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마음이 읽혀졌다.

딸아이는 약대 편입을 준비했다. 스스로 선택한 결정이라 열심히 하라며 격려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딸아이에게 우울증세가 있었는데 다소 심했다. 일 년 동안 잠을 하루 한 시간도 자지 못했다고 한다.

딸아이는 몰래 다이어트약을 복용하고 있었다. 한꺼번에 며칠 분의 약을 먹었던 모양이다. 딸아이는 병원 진료를 권했는데 거부했다. 도움 없이 혼자 극복할 수 있다며 큰소리까지 쳤다. 힘든 상황을 스스로 극복해야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며 도리어 나를 위로했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아 공부를 중단시킬 수 없었고 진료를 강요할 수도 없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머리가 백지장이 되어 두렵고 무서웠다. 그때부터 나는 아이 침대 아래에 잠자리를 폈다. 딸아이 걱정에 잠을 자지 못했다. 행여 내 손을 놓을까 봐 증세가 악화될까 봐 속이 탔다. 무엇보다 내가 아이에게 지칠까 봐 두려웠다.

딸아이가 아픈 모습을 보면서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내 자식의 아픔으로 허해진 마음을 어머니에게 의지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머니가 오빠를 위해 했던 것처럼 아이를 치료하기 위하여 이곳저곳을 다녔다. 내 딸을 살려달라고 모든 신에게 매달리고 빌었다. 그것도 모자라 많은 돈을 주고 굿까지 했다. 아이의 증세가 심해질 때는 출퇴근 시간에 차 안에서 운전대를 박박 긁으며 핏줄이 터져라 통곡도 했다.

내 어머니에게 후벼댈 가슴은 남아 있었을까. 아들에게 태양이 뜨기를 얼마나 기다렸을까. 오빠의  사고를 어머니 당신 탓으로 돌리며 아들을 살려달라고 얼마나 외쳤을까. 오빠의 사고가 어머니에게 세상이 무너지는 슬픔이었음을 딸이 아프기 전까지 몰랐다. 나는 단지 오빠의 동생이었을 뿐이었다. 사십여 년 전 한밤중 어머니가 토해냈던 눈물이 아픈 자식을 둔 어미의 오열이었음을 이제 알았다.

딸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나도 어머니처럼 자식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어미의 대열에 들어섰다. 다행히 다이어트약을 먹지 않고 공부를 중단하니 하루가 다르게 증세가 호전되었다. 아이와 마음을 다시 나눈 지 일 년이 지났다. 딸아이는 예전의 맑고 쾌활한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다.

저작권자 © 전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