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작품은 일반적인 여느 여류화가들의 그것처럼 밝고 가볍거나 혹은 화려하거나 매끄럽지도 않았다. 모든 여성 작가들이 그런 것은 아닐 터이지만 특히 그녀의 작품은 남달랐다. 필세가 굵고 힘이 넘치며 무겁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그 특징으로 깊고 숙성된 맛은 특별하였다. 그 작품들이 특히 동시대 다른 남성작가들 못지않은 에너지와 오래 묵은 장맛을 낼 수 있었던 연유는 아무래도 전라도 특유의 흙빛과 바람에 있었을 터였다. 그녀의 붓질은 굵직한 판소리 가락과 같고, 투박한 질감은 쉰 소리 그대로였다. 깊이 스민 물맛은 오래 숙성된 장맛과 같았고, 표현의 자유로움은 질그릇에 그려진 무심(無心)의 표현처럼 여유로웠다. 그 인물이 박래현이다. 박래현은 이곳 군산과 전주에서 성장하며 예술적 감성을 키워냈다.
  그리고 그녀의 작품은 한시도 한자리에서 머물지 않고 항상 새로운 변화로 가득했었다. 어쩌면 시대적 흐름이 그녀를 한시도 제자리에 두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마치 그 방향을 예측할 수 없는 태풍처럼 휘젓고 다녔던 우리 현대사를 그대로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가을 초입에 불어 닥쳤던 태풍 차바가 할퀴고 간 상처도 사실 만만치 않았다. 땅이 부셔지고 사람이 죽어나갔다. 설령 그렇더라도 자연의 태풍이 아무리 거칠더라도 그것은 사람들의 희망마저 빼앗지는 못하는 것이었다. 상처는 어느새 아물고, 부러지고 뽑힌 나무 그루터기에서는 다시 싹이 돋는 법이었다. 자연은 가끔 그렇게 견디기 힘들 것 같은 바람을 보내 생명들의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더라도 역사의 태풍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일이라 할 만하였다.
  지난 세기에 한반도에 불어 닥친 바람은 유래가 없었던 그야말로 피바람이었다. 그것이 다름 아닌 왜풍(倭風)이었다. 그 왜풍을 받아 현대라는 새로운 생명을 일구었던 작가가 박래현이다.

 그런데 특히 이곳 전라도 군산의 왜풍은 실로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한반도에서 조선조의 전통을 가장 뿌리 깊게 견지해왔던 전주의 여러 문화 활동도 영향을 받았던 것이 사실이지만 특히 미술을 통한 군산에서의 왜풍은 상당히 거세게 일었다. 그런데 이 회오리 한가운데로 한 어린 소녀가 찾아들었다. 지난 1926년 그의 나이 여섯 살에 군산으로 흘러들어온 소녀가 바로 박래현이었다. 이 낯설은 어린 소녀가 훗날 한국미술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인물이 될 줄은 아마도 그의 손을 끌었던 부모마저도 짐작하지 못하였을 터였다. 사실 이 땅 어느 곳인들 서릿발 같은 왜풍으로 고통스럽지 않은 곳이 없었을 터이지만 그러나 전라도 군산은 그 어느 곳 보다도 큰 회오리의 중심이었다.
   특히 거리 중심에는 왜색 문화가 파도처럼 넘쳐났던 곳이었다. 훗날 우리 미술계에 커다란 인물로 성장했던 우향(雨鄕) 박래현(朴崍賢1920 -1976)이 평안남도 진남포(鎭南浦)에서 군산 구암동으로 자리를 옮겨온 것은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진남포인들 왜색이 어찌 없었겠는가마는 차라리 더 큰 바람을 맞을 준비를 했던 것이었다. 일본인들은 앞서서 황실문화관을 만들어 미술 전시를 비롯하여 각종 문화행사를 열었다. 어린 박래현은 이와 같은 정황을 스스로 꼼꼼히 챙겼을 것이다. 어쩌면 당시 신미술로 불렸을 각종 신기한 표현들이 그의 가슴속에서 숙성되고 있었을지 모른다. 아마도 부친 박명수는 호기심이 남달랐던 그에게 새로운 변화를 직접 대면하게 하려했을 것이다. 사실 그녀는 매우 활달하고 진취적인 성격으로 다양한 활동에 흥미를 보였다고 하였다. 공부에도 뛰어났던 그녀의 어릴 적 꿈은 사실 의사나 영화감독 같은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렇더라도 이 곳 전라도 땅은 그녀를 준비된 길로 안내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말하자면 새로운 세상의 바람이 그녀를 선택하였다고 보아야 했다.  
 

그녀는 군산 공립보통학교를 다니며 일본인 미술교사 에구치 게이시로(江口敬四郞)로부터 미술을 배웠다고 한다. 그리고 전주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또한 일본인 미술교사에게서 수채화나 유화 등을 배웠을 터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녀는 전주에서 그야말로 전통적인 서화나 소리 등 각종 전통문화를 스스로 체득하였고, 이러한 시간들이 그를 운명적으로 이끌어갔던 것이다. 그가 훗날 성장하여 동양화를 선택한 연유를 찾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녀의 동양화에 대한 이해는 전주여고보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가 경성사범대에 입학하고 인물화를 잘했다는 일본인 화가 에구치(江口敬郞)를 통해 수채화와 동양화를 개인적으로 공부하면서라 하였다. 그리고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오랫동안 서서히 다듬어졌던 화가에 대한 꿈이 마무리되어 갔던 것이다. 그가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고향에 돌아와 순창여고보에서 일 년 남짓 교편을 잡았으나 이미 꽃이 피어버린 그 꿈은 그를 고향에 남겨두지 않았다. 그녀가 드디어 멀고도 먼 예술가의 길에 들어 고향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간 해가 1940년 나이 스물이었다.
  그리고 1944년에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 일본화과를 졸업했다. 그러나 그녀의 열정은 동양화에 머물지 못했다. 후에 다시 뉴욕으로 건너가 플래트 그래픽 센터와 봅 블랙번 판화연구소에서 판화를 공부하였는가 하면, 타피스터리, 파피에꼴레 등 실로 당시 한반도에서 낯설었던 다양한 분야를 소화해 갔다. 그러나 이러한 학습은 결국 우리 전통 동양화를 새롭게 혁신하고자 하였던 의지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작품은 끝내 동양화의 모필을 떠나지 않았으며 특유의 발묵과 물의 흐름을 중시하였다. 그러면서 독자적 표현으로 사물을 재해석하여 평면화하고 서정화시키며 재구성한 화면은 실로 당대 동양화의 혁신을 위한 커다란 바람으로 형성되었다. 그녀가 초기에 얻었던 일본풍 동양화나 서양식 표현을 넘어선 것은 오로지 고향의 의지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일제와 전쟁을 통한 한반도의 시대적 풍파(風波)를 자신의 것으로 소화한 가장 대표적인 현대작가였다. 시대의 흐름을 이처럼 의연하게 소화할 수 있었던 그의 이러한 태도는 아무래도 그가 어린 시절 고향에서 키워낸 예술혼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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