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지리산 골에는 운봉이 있다. 운봉은 구름이 노는 산봉우리를 말하는 것이지만 이를 우리는 글자로만 이해할 일은 아닐 것이다. 더욱이 이곳 운봉에서는 우리민족의 한을 소리로 풀어낸 가왕이라 부르는 소리꾼 송흥록이 태어난 곳이다. 그가 왜 하필 깊은 산골 운봉에서 태어나야 했는지 그 내력을 읽는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인 듯하다.
 아주 오래된 옛날이었다. 세상이 하도 고요하여 시간이라는 존재도 없었고 그리고 사람의 모습도 없었던 매우 오래전의 일이었다. 하늘의 천재(天宰) 환인(桓因)은 맑고 고운 땅을 찾아 아들 환웅을 내려 보냈다. 그곳은 세상에서 가장 잠잠하고 청정하여 새로운 세상을 일구기에 족하였다. 그래서 환웅(桓雄)은 풍백(風伯)과 우사(雨師) 그리고 운사(雲師)를 동행하여 자리를 잡았는데, 그곳이 태백산 신단수 아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아들 단군의 후손이 되었다. 우리가 배웠던 우리 민족사의 이야기다.
 환웅이 자리를 잡았던 태백산 신단수가 지금 어디였는지는 하도 오래된 일이라 그곳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 그렇더라도 한반도가 태백의 준령으로 이루어져 태백산은 이해할만 하다 하겠으나 그렇다면 신단수(神檀樹)를 찾아야 한다. 그런데 신단수는 신이 머무는 나무라 할 것이나 이를 글자대로 나무로만 해석할 일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나무는 상징적 표상어일 뿐일지도 모른다. 분명 하늘로 곧게 솟은 그 형상에서 빌려온 것일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신단수는 사실 지리산을 그렇게 은유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을 만하다.

지리산(智異山)의 본래 이름은 지리산(地理山)이었다 한다. 왕도(王道) 즉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는 땅이라는 의미인 듯하다. 그 말도 옛 글자 “달”에서 소리가 파생되어 그리되었다 한다. 그래서 그 내력이 특별하다. 웅장하나 부드럽고, 기세가 하늘과 가까우나 오히려 편안한 안정감이 환웅이 자리 잡기에 족했던 곳이었다. 그래서 지리산 정상을 천왕봉이라 칭하였던 연유가 있었다. 신단수가 지리산이라 이해한다면 환웅이 터를 잡은 곳이 어쩌면 그 아래 운봉이었을 것이다. 운봉은 지리산 중턱아래 제법 너른 들을 이루고 구름 속에 머문다하여 운봉이라 하였다. 운봉(雲峰)이 처음 이름을 갖기에는 신라 때이고 초기에는 모산성(母山城)이라 하였다. 그리고 다시 757년(경덕왕 16)에 운봉(雲峰)으로 고쳤다 하니 그곳이 처음 우리의 탯줄이 있었던 자리로서 이해할 수도 있을 듯하다. 구름이 머문다는 운봉은 하늘의 땅이라는 뜻이고 그곳에 한민족의 어머니가 머물렀던 곳이라는 의미로 모산성이었다. 운봉이 신단수 아래였고 구름신(雲師)과 비의 신(雨師)에서 비롯된 명칭이었음을 이해할 만하다.
 이 터에 환웅은 특별히 풍백을 데리고 왔다. 글자대로라면 풍백(風伯)은 움막 속의 곤충들을 일컫는 것이지만 실상 천재를 맞이하는 땅의 뭇 생명들을 의미한다. 그 생명들의 소리를 바람(風)이라 하였던 것이다. 이 소리를 우리말로 풀어낸 이가 송흥록이었다. 
 사람들은 송흥록을 가리켜 가왕이라 칭하면서 동편제의 창시자라 부른다. 우리 소리에 동편제와 서편제가 따로 구분된다는 것이다. 본래 한 몸이었던 소리가 동. 서로 나뉘었다는 것은 실상 우리 소리가 완성되었다는 뜻이라 믿는다. 소리를 모르는 필자가 그 구분을 알 리 없으나 태극이 본래 하나이나 또한 둘인 것과 같은 이치가 있는 듯하다. 동과 서는 태양과 달을 의미한다. 동쪽은 태양신이 머물러 그리 부르고, 해가 지는 서쪽에는 달의 신이 산다. 음. 양이 서로 마주하고 한 몸을 이루는 것과 같다고 볼 것이다. 운봉의 소리가 동편제의 뿌리이고 이 소리가 내려와 섬진강을 건너면 서편제라 부른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섬진강은 달 신을 상징하는 두꺼비가 노는 물이라는 말이니 당연하다. 후세 사람들이 동편제는 웅장하며 힘이 넘치고, 서편제는 부드럽고 섬세한 감정을 담았다 하니 태양신과 달 신의 성정을 그대로 읊었던 데서 그리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할 것이다.

송흥록이 이와 같은 매우 오래된 내력을 받아낸 것이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다. 운봉은 남원에서 잘 다듬어진 24번 지방도로를 타고 500여m 남짓 되는 여원재를 올라서야 들 수 있다. 그야말로 지리산 품속 깊숙한 곳이다. 제법 넙직한 들녘은 누런 금빛으로 가을을 그리고 있었다. 그가 태어난 비전리 생가는 잘 다듬어진 물길을 건너 지리산을 바라보고 서 있다. 비록 너른 들 한가운데 낮은 동산을 배고 서 있다하나 그가 태어난 그 시절에 서서 보면 이곳에서 우리 소리가 솟아났다는 것은 아무래도 신기한 일이다.
 실상 송흥록(宋興祿)은 그 태어나고(1780년경) 돌아간(1863년경) 시간도 분명치 않다. 실로 바람처럼 떠돌다 세상을 깨우고 소리만 남기고 떠났다. 묘하게 부르는 그의 소리를 보고 사람들이 일러 그를 가무보살(歌舞菩薩)이 나타났다고 하였다 한다. 그의 기골이 뛰어난 풍채며, 소리에 천부적 재질 그리고 총명함은 그가 신단수아래에서 태어나야했던 인물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부친 송첨지 또한 당대 명창 권삼득의 고수로서 활동했으니 일찍부터 내림으로 소리를 이어가라는 운명을 받았던 것이다. 송흥록의 소리공부를 도왔던 백운산의 월광선사(月光禪師)는 “네가 부르는 소리는 우주의 삼라만상의 소리”라 하며 이 땅 백성들의 삶의 애환을 읽어내는 것이라 알려 주었다. 이는 분명 그가 옛 모산성에서 풍백의 음성을 들었음이다.
 그가 어느 무덤에 누워 귀곡성(鬼哭聲)을 터득하였고, 세상의 모든 소리라 하는 것은 그를 비껴가지 않았다 했다. 그가 신단수 아래에서 풍백의 내림을 받은 것이 아니고서야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더구나 동생 광록(光綠), 그의 아들 우룡(雨龍), 우룡의 아들 만갑(萬甲)으로 이어진 그의 소리家系가 그 믿음을 더한다. 국창 박초월(1916-1983) 또한 이 터에서 만갑으로부터 소리를 얻었으니, 참으로 운봉은 송흥록을 통해 천재(天宰)의 뜻을 펼쳤던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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