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첩이 깊은 산골에도 봄은 가득 담겨있다. 마치 몇 겹의 보자기로 신중하고 정성스럽게 감싼 선물을 헤집어 보는 것 같은 순창의 봄이었다. 어쩌면 옛 글에서나 읽었던 무릉도원의 세계를 눈앞에서 만났는지도 모르겠다. 안견이 그린 무릉도원도가 결코 이보다 더 곱지는 않을 것이다. 마침 가벼운 봄비 소식이 있어 간간이 잔비가 내릴 듯 말 듯 하는 하늘은 속이 깊고, 하얀 사기로 구운 물그릇에 먹물이 번지듯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서 하얀 봄꽃들이 더욱 돋보이는 날이다. 봄은 어떻게 이렇듯 깊은 산골까지 잊지 않고 찾아드는지 참으로 신기하기만 하다. 순창에는 어릴 적 소풍놀이에서 꼭 찾아야만 했던 보물처럼 그렇게 깊숙이 감추어둔 내력이 있는 산골이다.

옛 사람들이 말하기를 “죽어서 순창에 눕는 것이 가장 큰 복”이라 하였다 한다. 순창은 그런 고을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의 발길을 쉽게 내 주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순창은 회문산을 정점으로 하여 좌측에는 풍악산과 설산으로 이어지고, 오른편으로는 내장산과 추월산 그리고 연이어 여문산, 산성산으로 둘러져 있는 마치 깊은 숲속 옹달샘처럼 생겼다. 그 샘물은 잔잔히 남쪽으로 흘러 담양을 지나 남도 들녘으로 흐른다. 순창은 이처럼 신비하고 아득한 선인들의 세계였음에 틀림없다. 내장산이 보내는 淨水와 성수산이 내려주는 맑은 精靈들이 만나서 적성으로 찾아들며 섬진강을 이루는데, 동계를 지나 흘러오는 팔공산의 眞水와 또한 한 몸이 되어 순창을 적시고 남해로 흘러간다. 그래서 사실 섬진(蟾津)강은 순창에서 온전한 제 모습을 갖추어 지리산에 들렀다가 남해로 가는 것이다. 섬진은 두꺼비가 머무는 물가라는 말이니 순창의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 옛 그림에는 달 속에 두꺼비가 자주 나타났다. 즉 두꺼비는 달을 상징하였는데 이는 생산과 풍요를 의미하는 달신의 모습인 것이다. 순창(淳昌)이라 불리는 이 땅이 그 이름에서 의미하는 바가 앞선 이야기와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순박한 아름다움이 크게 넘쳐난다는 것은 곧 달의 여신을 일컫는다는 말과 다르지 않음이다. 순창이 깊숙한 옹달샘처럼 굳이 그렇게 깊고 신비하게 자리하고 있었던 내막을 이해할만 하다. 그러나 순창이 오랫동안 달신의 거처로 사람들의 발길을 멀리하며 청정하게 지켜져 온 연유는 또 있었다.

옥정호에서 잠시 머물다 쉬엄쉬엄 흘러가는 섬진강 물길을 따라 팽팽하게 물이 오른 매끈한 산자락을 여유롭게 달려가 덕치고개를 넘었다. 인계에 접어든 것이다. 섬진강은 아마도 인계와 동계를 나누고 적성에 들려 한가하게 놀다가 다시 유등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마음이 급해 섬진과 길을 나누고 곧장 순창읍에 들었다. 그렇게 급한 걸음이었지만 산 등에 피어난 진달래마저 지나치지는 못한다. 한국인의 마음이고 눈물이었던 진달래의 그 여리고 맑은 빛은 아무래도 청초한 봄의 여신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진달래가 아무리 그렇더라도 급한 것은 순창의 장승을 만나는 일이었다. 긴긴 시간 달신의 고향, 그래서 성스러운 땅의 순결을 지켜온 장승이었다. 그래서 이름을 장승(長丞)이라 했다. 오래도록 달신을 지켜온 까닭이다. 그래서 서둘러 순창 푸른숲공원에서 석장승을 만났다. 순창읍 남계리에 있는 푸른숲공원에는 두기의 석장승이 마주보고 서 있는데, 이 두 장승은 틀림없이 부부인 듯 생각되었다. 동편에 서있는 장승은 몸체가 아무래도 여성적이고 선이 곱다. 눈웃음이 부드럽고 애틋하며 마치 무릎을 모으고 기다리는 색시모습이다. 반면에 서편의 장승은 날렵한 몸체에 단단해 보이는 근육이 남성적이다. 두 부부가 본래는 더 멀리 떨어져 있으며 순창을 지켜오다가 이제는 여기에다 보금자리를 마련한 듯하다. 달신의 후예들이였던 이곳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양지천과 경천이 만나는 삼각지대에 모여 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언제나 섬진강을 따라 따뜻한 남쪽 바다를 그리워했을 것이다. 그 속을 엿들었던 회문산 너머 북풍은 달신의 마음을 얻으려 할 일없이 넘나들었다. 그래서 끝내는 북쪽 입구에 두 부부의 석장승을 세워 그 북풍을 막았다. 그 후 순창은 무병장수를 이루었던 선인의 세상을 이루었다. 본래 여인은 동쪽 지금의 중앙초등학교 앞 남계리에, 그리고 남정은 서쪽 지금의 순창고등학교 옆 충신리에 있었다 한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던 것을 훗날 한 자리로 옮겨 재회를 도모하였다.

장승 가운데서 순창 석장승은 그 풍모나 조각의 아름다움에서 단연 돋보이는 모습이다. 사실 우리 역사에 장승은 곳곳에서 세워졌고 그에 대한 신앙이 유독 깊고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로 나무로 많이 만들었으나 나무는 오래 견디기 어려웠다. 그래서 남아있는 장승으로 순창의 돌장승은 특별한 것이라 할 만하다. 그리고 석장승 만큼 우리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와 함께 울어주고 또 웃어주며 지내왔던 것도 드물 것이다. 대개 고을이나 마을 입구에 서서 동고동락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때가 되면 장승에 갖은 정성을 드려 제사를 지내기도 하고 혹은 당산제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는 모두 장승에 신격을 부여해 사람들의 염원과 기도를 올린 것이다. 실상 순창의 이 돌장승도 언제부터 이곳에 서 있었는지 아는 이는 없다. 마치 어느 날 갑자기 떨어진 별똥처럼 그렇게 순창에 나타났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주 오래전 달신이 이곳을 거처로 삼았던 그 때부터 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떻든 약간 거친 화강석으로 다듬어진 두 장승 중 역시 여성의 매무새가 아름답고 정성이 깊다. 이름도 없이 소탈한 여성적 장승을 그냥 남계리 석장승이라 불렀다. 충신리 석장승보다 키가 약간 크지만 몸체는 작은 편이다. 두 장승 모두 머리에 높은 두건을 쓰고 무척이나 서민적 친근감을 주려 해학적인 웃음을 담고 있다. 현재는 물론이려니와 과거와 미래까지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는 이마의 백호(白毫)가 두 장승에서 뚜렷하다. 또한 수인(手印)은 마치 사람들에게 삶을 걱정하지 말라고 달래는 듯 활짝 펴고 있는 모습인데 모두 장승이 초월적인 능력을 가진 신상(神像)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남계리 장승에는 목에 3도가 있어 부처와 같은 반열에 있음을 느끼게 한다. 부처의 현신이 달신의 고향 순창을 지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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