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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암일기』를 남긴 해남 출신 전라감사 유희춘

기사승인 2022.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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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암일기(내지)
   
▲ 담양 미암 사당(전라남도 민속문화재, 문화재청)


미암 유희춘은 성리학의 대가로 해남에 살다가 처향 창평(담양)으로 옮겨 살았다. 명종 2년에 문정왕후를 비난하는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20여 년간 유배되었다가 복직되어 선조 4년(1571)에 전라감사로 부임하였다. 10년간에 걸쳐 쓴 자필 일기 『미암일기』로 유명한데, 이 일기는 『선조실록』 편찬의 기본 자료로 쓰였으며, 조선시대 사대부의 일상생활과 감영제도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전라도 해남 출신, 처향 담양으로 이주
유희춘(柳希春)은 중종 8년(1513) 전라도 해남현 해리 외가에서 태어났으며, 선조 10년(1577) 65세로 졸하였다. 본관은 선산(善山), 자(字)는 인중(仁仲), 호는 미암(眉巖)이다. 미암은 해남의 진산 금강산 기슭의 미암바위 이름을 따서 스스로 붙인 호이다. 금강산 남쪽 기슭에 살았으며, 집 뒤의 바위가 ‘아미(蛾眉:아름다운 눈썹)’ 모양이었다. 현재 미암의 생가는 사라지고 생가터만 남아 있다. 미암은 해남에서 살다가 처가인 창평(현 담양)으로 옮겨 살았다.
미암 집안은 고조부 유문호(柳文浩)가 감포 만호를 지냈으며, 영남에서 전라도 순천으로 이거하였다. 증조부 유양수와 조부 유공준은 별다른 관직을 지내지 못했다. 부친 유계린(柳桂隣)은 김굉필과 장인 최부의 문인으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나 벼슬에 오르지는 못하였다. 
미암의 어머니는 호남 사림을 이끈 대학자이며 『표해록』의 저자인 금남(錦南) 최부(崔溥)의 딸이다. 유계린은 스승인 최부의 딸과 혼인하고 처가를 따라 순천에서 해남으로 이주하였다. 최부는 나주 출신이지만,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가졌던 해남 정씨 훈련원 참군(參軍) 정귀함(鄭貴?)의 딸과 혼인하여 해남으로 이주해 있었다. 최부는 무오사화 때 유배되어 갑자사화 때 사사되었다. 
▶하서 김인후와 사돈지간, 각별한 관계
미암은 전라감사를 지낸 김안국과 외조부 최부의 제자 최산두에게 수학하였다. 김안국과 최산두는 모두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곤욕을 치른 기묘명현들이다. 미암의 형 유성춘(柳成春)도 이조정랑을 지내고 촉망받는 인물이었지만 기묘사화 때 유배되어 이듬해 28세의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 죽었다. 유성춘은 최산두ㆍ윤구와 함께 ‘호남삼걸’이라 불렸다. 
미암은 최부의 학통을 계승하여 이항ㆍ김인후 등과 함께 조선초 호남지역의 학풍조성에 기여한 호남사림의 대표적 인물이다. 미암은 기대승과 함께 홍문관에서 근무하며 학문을 논했고, 고향에 내려갈 때면 송순을 찾아가 교류하였으며, 퇴계, 율곡 등과도 교유하였다. 
미암 유희춘은 하서 김인후와 각별한 관계로 사돈이 되었다. 김인후는 장성 출신으로 향교 문묘에 배향된 동방 18현 중 유일한 호남사람으로 미암과 절친하였다. 허균의 『성소부부고(惺所覆?藁)』에 다음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하서가 문과 급제하기 이전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전염병에 걸려 위독한데 아무도 돌보지 않았다. 미암이 성균관 관리로 있으면서 하서를 자기 집으로 데려와 돌보아 병을 낫게 하였다. 하서는 이를 감사히 여겨 훗날 미암이 종성으로 유배되었을 때, 미암의 하나 있는 자식이 어리석음에도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위로 맞이하였다. 
▶20여년의 유배생활 후 복직
미암은 25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26세 되던 중종 33년(1538)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중종 39년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 전념하도록 휴가를 주던 제도)한 뒤 홍문관 수찬과 사간원 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미암은 명종 2년(1547) 35세 때 양재역(良才驛)의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20여 년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이 사건은 경기도 과천 양재역에 ‘위로는 여주(女主), 아래에는 간신 이기(李?)가 있어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이라는, 문정왕후를 비난하는 벽서가 붙어 일어난 옥사로 윤원형이 을사사화 이후 잔존한 대윤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꾸며낸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미암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이 고향인 해남과 가깝다고 하여 함경도 종성에 이배되어 18년간 귀양살이를 하였다. 명종 20년 문정왕후가 죽고 윤원형이 축출되자 충청도 은진에 이배되었다가 1567년 선조가 즉위하면서 삼정승의 요청으로 석방되었다. 
▶전라감사 부임, 일기에 감사 업무 기록 
20여 년간의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미암은 경연관 겸 성균관 직강(直講)으로 벼슬길에 다시 올라 홍문관 교리ㆍ우부승지,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 부제학 등을 지내고 선조 4년(1571) 59세 때에 통정대부로 전라감사에 2월에 임용되어 3월에 부임하였다. 『호남도선생안』에는 4월에 도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미암일기』에는 3월에 도임한 것으로 되어 있다. 
『미암일기』(11책, 보물)는 그가 유배에서 풀려 복직한 1567년 10월부터 세상을 뜨기 직전인 1577년 5월까지 10년간에 걸쳐 쓴 일기로, 조선 사대부의 일상과 감영제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일기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따로 다룰 예정이다.
미암은 전라감사에 부임한 선조 4년 그해 10월에 대사헌에 임용되어 이임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대사헌을 사직하였으며, 이후 홍문관 부제학, 대사헌, 예조참판, 이조참판, 한성부우윤 등을 지내고 선조 8년(1575) 63세에 창평 수국리(현 담양)로 낙향하여 선조 10년 향년 65세로 여생을 마감하였다. 
▶경서에 해박하고 식견이 뛰어난 경연관
그는 경전에 널리 통하였고, 제자(諸子)와 역사에도 능하였다. 시강원 설서 재임 시에 세자(후의 인종)의 교육을 도왔고, 선조초에는 경연관으로 경사(經史) 강론에 종사하였다. 선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에 그에게 배웠으므로 항상 이르기를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은 희춘에게 힘입은 바가 크다.”라고 하였다. 그는 뛰어난 식견과 해박한 지식을 지닌 탁월한 경연관이었다. 만년에는 왕명으로 경서(經書)의 구결언해(口訣諺解)에 참여하여 ??대학??을 완성하고, ??논어??를 주해하다가 마치지 못하고 죽었다. 
그의 성품에 대해 허균의 『성소부부고』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미암은 매우 우활(迂闊)해서 가사(家事)를 다스릴 줄 몰랐고, 의관과 버선이 때 묻고 해어져도 부인이 새것으로 바꿔주지 않으면 꾸밀 줄을 몰랐다. 거처하는 방은 책을 펴놓은 책상 외에는 비록 먼지와 때가 끼어 더러워도 쓸고 닦지 않았다. 세상일을 말할 때는 무지한 사람 같지만, 격물 치지(格物致知)와 성의 정심(誠意正心)하는 공부와 신심(身心)을 다스리는 방법에 이르면 뛰어난 의견과 해박한 지식이 다른 사람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사후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담양의 의암서원(義巖書院), 무장의 충현사(忠賢祠), 종성의 종산서원(鍾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절(文節)로 인조 때 받았다. 미암은 서예에도 조예가 깊었다.
▶시대를 앞서간 부인 송덕봉
미암의 처는 시대를 앞서간 여성으로 이름 높은 시인 송덕봉(宋德峰, 1521~1578)이다. 송덕봉은 남편 미암에게 당당한 권리를 주장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송덕봉은 홍주 송씨 생원 송준(宋駿)의 딸로 담양 출신이며 경사(經史)와 시문에 뛰어났다. 그녀의 휘(諱)는 종개(鍾介), 자는 성중(成仲)이며, 호는 덕봉이다. 조선시대 여성으로서는 흔치 않게 휘와 자, 호를 모두 가졌다. 덕봉은 그녀가 태어난 전남 담양군 대곡면의 집 뒤에 위치한 산 이름이다. 이곳에 이들 부부를 기리는 미암(眉巖)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유희춘이 그녀의 시문을 모아 필사본 문집을 선물하였는데 불행히도 간행되기 전에 분실되었고, 최근 2011년에 덕봉의 시문을 모아 시문집 『덕봉집』을 편찬하고, 이듬해 이를 국역하여 발간하였다.
이 동 희 (예원예술대학교 교수, 前 전주역사박물관장)




최병호 기자 cbh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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