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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처럼 학처럼 유유자적

기사승인 2020.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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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문철의 수묵으로 본 전북-3. 순창 귀래정>

   
 

벼슬 버리고 돌아온 것은 무슨 일인가/정자는 중앙에 자리 잡고 샘과 돌은 절경이기 때문이네/강물은 달리고 들은 멀리 퍼져 있으며/산은 작은 정자를 안고 높았네/대숲이 있으니 뜰이 고루 고요하고/어여쁜 꽃은 자리를 다시 아름답게 꾸몄네/마음은 애오라지 스스로를 즐김에 맡겼으니/이미 세상과는 서로 어긋나네! (강희맹의 「귀래정」 중에서)

조선 전기의 문신 신말주(申末舟)는 집현전 학사였던 신숙주의 동생으로,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오르자 두 임금을 모실 수 없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벼슬에서 물러나 처의 고향인 순창으로 낙향하였다. 낙향한 그는 세조 2년(1456년)에 이곳 순창에 자신의 호를 딴 귀래정(歸來亭)을 짓고 혼란한 세상을 등진 채 시문을 벗 삼아 세월을 보냈다.

벼슬을 버리고 은둔의 삶을 사는 선비를 만나러 가는 길은 이러할까. 순창읍 가남리에 있는 귀래정(歸來亭) 입구는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사람의 발길이 느껴지지 않은 오솔길을 살망살망 올라가자, 귀래정의 주인공을 닮은 듯한 소나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거북등처럼 갈라진 노송들 사이로 건듯 부는 바람을 보내고 나지막한 언덕에 오르니 귀래정은 꿋꿋한 선비의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귀래정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으로 지붕은 팔작지붕 형태의 건물로 사방이 확 트여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했다. 정자의 처마 밑에는 ‘歸來亭’이라는, 각기 크기가 다른 현판 3개가 걸려있다. 정면 오른쪽에 걸려있는 ‘한운야학(閒雲野鶴)’이라는 현판은 ‘한가로운 구름 아래 노니는 들의 학’이라는 뜻으로, 벼슬을 버리고 강호에 묻혀 사는 한가로움 속에 유유자적한 생활을 한 주인 신말주를 의미한 듯싶다. 또한, 귀래정에는 서거정의 「귀래정기」, 강희맹의 「귀래정」, 김인후의 「영귀래정」 등의 시문이 적힌 편액들의 다수 걸려있다. 일부는 새롭게 제작하여 걸어놓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편액은 오랜 세월 동안 바람이 쓰다듬고 간 흔적이 역력했다.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선비를 위해 벗들이 지은 위로와 격려의 말씀들이 낡은 액자에서 살아 숨 쉬는 듯했다.
귀래정에서 바라본 순창 읍내는 ‘생거순창(生居淳昌), 사거순창(死居淳昌)’이라는 말이 실감 났다. 귀래정을 중심으로 빙 둘러 있는 산은 순창 곳곳이 명당자리임을 말해주는 듯했다. 또한, 그 산들은 전혀 사나움이 없고 산세가 유순하며 여성적이었다. 순창에 장류가 발전하고 자수로 만든 베개 딱지가 유명한 것은, 이러한 유순한 산세로 인해 여인들의 솜씨가 뛰어난 연유이리라.
순창의 여성 인물을 꼽는다면 신말주의 부인인 설씨부인을 들 수 있겠다. 설씨부인의 ‘권선문첩’(보물 제728호)은 선(善)을 권장하는 내용을 담아 쓴 글과 그림이 있는 문서로 강천사(剛泉寺)를 복원하기 위해 권선문을 짓고 사찰도를 그려 신도들에게 돌려 보게 하였다. 이 문첩은 조선시대 여류 문인이 쓴 가장 오래된 필적으로, 신사임당보다 약 70년이 앞선 선구적 작품으로 역사적 가치가 높다고 한다.

주군에 대한 충절로 인해 역사에서 밀려난 신말주가 시를 지으며 지냈던 귀래정은 7월의 녹음이 한창이었다. 더위에 지치고 세상에 치였을 때 귀래정 기둥에 기대앉아 내면의 소리를 들어보는 것도 좋겠다. 560여 년 전 묵객들이 주고받는 시문과 솔바람 노니는 소리에, 그만 사르르 선잠이 들것 같다.

/글 김인숙 시인
/그림 김문철 전주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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