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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 속에 비친 ‘미륵세상’

기사승인 2020.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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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형미의 숨은 보물 찾기- 1.선운산 동불암 마애불 ‘청자기와 닷집’>

   
 

칠송대(七松臺) ‘도솔암 마애불’

선운사라는 이름은 구름 속에서 참선 수도하여 큰 뜻을 깨친다라고 하는 참선와운(參禪臥雲)에서 유래되었다. 조선 후기 선운사가 번창할 당시에는 무려 89개의 암자와 24개의 굴, 189개에 이르는 요사가 산중 곳곳에 흩어져 있어 불국토를 이루었다고 전해진다.

선운사만큼이나 유명한 곳이 선운계곡이다. 선운산의 또 다른 이름인 도솔산(兜率山)에서 따와 ‘도솔천(兜率川)’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계곡. 선운산 일대 경관의 백미라 하여 명승 제54호로 등재된 곳이기도 하다. 이 계곡 따라 다양한 수종들이 어울려 살면서 때 묻지 않은 천혜의 자연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신록이 물속에 반영되어 물빛마저 푸르다.

선운사에서 서남쪽으로 2.5km 정도 더 오르면 도솔암이 나온다. 그리고 도솔암 서편으로 좀더 가면 국내 최대 규모의 마애불을 만나볼 수 있다. 소나무 일곱 그루가 서 있다 하여 칠송대(七松臺)라 부르는 곳. 현재는 다 사라지고 한 그루만 남아 장승처럼 서 있는 그 곳에 보물 제1200호로 지정된 거대 부처가 새겨져 있는 것이다.

절벽의 연꽃대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있는 마애불은, 신체에 비해 크고 투박한 손발을 하고 있다. 이마에는 백호(白毫)가 박혀 있고, 네모진 얼굴은 다소 딱딱하게도 보인다. 다시 말해 눈매나 얼굴이 그리 정교하거나 고운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나 어느 쪽에서 보든 무척이나 웅장하고 장대한 느낌이 든다. 크기가 40m에 달하는 바위에 옆으로 앉아 있는 좌상 길이만 해도 5m, 앉은 크기가 15m나 되는  육중함 때문일 거라.


공중누각 ‘동불암(東佛庵)’ 전설

1969년 5월에 처음 발견된 도솔암 마애불. 상부 쪽은 온전하게 암각 된 모습을 볼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아랫부분은 풍화작용에 의해서 많이 흐릿해져 있는 상태다. 이로 인해 예전에는 불두(佛頭) 위쪽에 공중누각 형식의 닷집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제 위덕왕이 선운사를 창건한 검단선사에게 부탁하여 암벽에 불상을 새기고, 그 위 암벽 꼭대기에 동불암(東佛庵)이라는 공중누각을 지었다는 전설도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방공(方孔)과 동목(棟木), 쇠못 등이 박혀 있었던 자국도 선연하다. 닷집에 사용된 것으로 보여지는 부러진 동목재(棟木材)와 대형 철못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박혀 있다. 그 위로는 네모진 구멍이 규칙적으로 뚫려 있는데, 과거 마애불과 관련된 법당 등의 건물이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해주고 있다.


동불암 청자기와와 연봉형 못 가리개

실제로 마애불 주변에서 고려시대 기와와 함께 청자기와, 연꽃 봉오리 모양의 청자 못 가리개가 출토되었다. 건물 지붕의 기와를 고정하는 튀어나온 못을 가리는 데 사용한 못 가리개는 연꽃 봉오리 모양으로 만들어 장식성까지 갖추었다. 신기한 것은 이 연봉형 못 가리개가 고려시대 것으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는 점이다. 조선시대에 넘어와서 백자 연봉형 못 가리개로 이어졌는데, 그 때의 것들은 통도사나 봉정사 등의 사찰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곳에서 나온 청자기와 또한 개경의 궁궐과 생산지인 청자 가마 이외의 장소에서는 처음 발견되었다고 한다. 고려사에 고려 의종년간(1157)에 청자기와를 만들어 사용한 기록이 있지만, 국내에서는 출토된 예가 극히 제한적이어서 매우 중요한 연구 가치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발견된 청자기와 중에는 ‘…利所造(이소조)…長中尹(장중윤)…’라는 글씨가 새겨진 기와 파편도 있다. 여기에서 ‘利所(이소)’는 고려시대에 수공업 제품을 생산하던 소(所) 가운데 하나일 거라는 얘기가 있다. 이 청자기와 파편은 지금은 ?국립전주박물관?에 연봉과 함께 전시되어 있어 언제든지 볼 수 있다.

이밖에 연화문과 귀목문 등이 새겨진 수막새류도 출토되었다. 이 중 연화문은 통일신라시대나 고려시대의 것이 많은데, 조선시대 막새에는 범어가 시문된 귀목문도 있다. ‘兜率山仲寺(도솔산중사)’가 새겨진 암키와 역시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된다. 이 명문으로 봐서 현재의 선운산이 당시에는 도솔산으로 불리어졌음을 알 수 있다.

참으로 놀랍지 않은가. 이 깊은 산중 거대 마애불 머리 위에 공중누각이 있었다는 것도 그렇거니와, 청자기와와 연봉으로 이루어진 닷집이라니. 어쩌면 이곳의 마애불을 그만큼 귀하게 여겼다는 증거일 터.  그래서인지 이곳은 보다 특별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 호남 미륵신앙의 주요성지가 되어 왔다. 


미륵불이 품고 있던 천지개벽의 비기(秘記)

동불암 마애불은 민중들로부터 절대적인 신봉을 받는 미륵불이자 민중의 꿈이었던 것. 그래서 이 마애불은 그에 걸맞은 많은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특히 미륵불이 품고 있던 천지개벽의 비기(秘記)에 관한 이야기는 지금도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선운사 도솔암 마애석불 비기 탈취사건.’ 그 옛날 동학의 3대 지도자의 한 사람인 손화중은 이 사건으로 인해 백성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았던 인물이다. 당시는 조선왕조의 봉건적 질서가 느슨해지면서 곧 조선이 망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던 때이다. 그와 함께 개벽을 꿈꾸는 민중들의 바람은 동학(東學)사상으로 새롭게 꿈틀대었다.

이 때 이 지역 사람들의 신앙의 중심은 도솔암 마애불 즉 미륵불에 있었다. 미륵불 배꼽 속에 비기가 들어 있어 비기가 꺼내어지는 날 천지가 개벽한다는 소문도 분분했다. 하지만 누구든 이 비기에 손을 대는 사람은 벼락을 맞아 죽는다는 말 또한 따랐다. 그러던 것이 임진년 8월 손화중에 의해 꺼내어지게 되었으니,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은 자명한 일. 비기 속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일은 동학농민전쟁의 기폭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사람들은 대개 동학농민전쟁 하면 크게 대승을 했던 황토현 전적지를 많이 떠올린다. 하지만 이곳의 미륵불이야말로 혁명의 불씨를 터뜨린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심장한 곳이 아닐까. 선운사는 국내 유일 3지장(三地藏: 天地藏?人地藏?地地藏) 기도도량이다. 미륵부처가 오기 전 인간세상을 다스리는 보살이 지장보살이므로, 이 사건을 계기로 민중들이 그리도 염원하던 미륵세상을 보게 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여 선운산에서 발원해 동쪽으로 흘러 주진천까지 이르는 도솔천도 다른 계곡물과 달리 서출동류(西出東流)하는 것은 아닐는지.
/김형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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