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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긋문 미소’ 속에 감춰진 천년의 신비

기사승인 2020.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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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순창 홀어머니산성(대모산성) 7세기 백제시대 처음 축성 고려 이래 단오절 전후 ‘성황제’

   
 

순창읍에서 고추장민속마을 방향으로 도보로 15분에서 20분을 걸으면 오른쪽으로 아담하게 자리 잡은 두 개의 작은 야산을 볼 수 있다. 대모산성이다. 대모산성은 예로부터 풍수지리학상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런지 중앙에 전통사찰 대모암이 고즈넉이 자리잡고 있다. 특히 대모암을 오르기전 옆으로 가는 산책로는 걷다 보면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70호 홀어머니산성을 만날 수 있다. 순창의 대표적적 산성인 홀어머니 산성은 읍내에서 지리적으로 가까워 최근 주민들의 산책길로 큰 각광을 받고 있다. 또 백제시대 어긋문 형식의 산성은 찾는 이들에게 신비로운 인상을 전해 준다.

순창의 대표 산성 백제의 미소를 간직한 홀어머니 산성을 소개한다.

 

대모산성의 역사를 말하다.

 

순창군 순창읍 대모산 자락에 위치한 홀어머니산성은 7세기 백제시대에 처음 축성되어 조선시대까지 군창(軍倉)으로, 전시엔 전투 및 피난시설로 활용됐다. 특히 고려시대 이래 단오절을 전후하여 성황대신을 모시는 ‘성황제’가 거행되었던 순창의 성지(聖地)로 알려지고 있다.

2001년부터 발굴을 시작해서 현재가지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홀어머니산성은 백제시대 도실군(道實郡)의 치소성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2001년∼2005년의 발굴조사를 통해 북문지의 동쪽 정상부의 평탄지에서 고려시대의 군창지가 확인됐다. ‘연우 원년[延祐元年, 1314년(고려 충숙왕 1년)]’, ‘刀谷官’, ‘朋心東’, ‘卍’이라는 명문와(銘文瓦)가 출토되었으며, 군창은 조선시대 초기까지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2012년에는 배수시설, 2017년에는 백제 기와, 성벽 및 고려시대 건물지, 집수정 추정지, 명문와(卍, 官), 솥, 칼, 낫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고 산성의 전체적인 모양은 사다리꼴이고, 둘레는 약 875m로 중형 산성에 속하며, 담양의 금성산성 다음으로 규모가 큰 산성이다.

산성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권151 순창군조에 ‘대모산석성(大母山石城) : 둘레가 390보이며, 안에 작은 샘이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도 마르지 않으며, 군창이 있다. [周圍三百九十步 內有小泉 冬夏不渴 有軍倉]’이라는 기록과,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권39 순창 성곽조의 ‘대모산성(大母山城) : 군의 서쪽 4리에 있는데, 석축으로 둘레는 780자, 높이 26자, 그 안에 연못과 샘이 각각 하나씩 있고 군창이 있다.[在郡西四里 石築周七百八十尺 高二十六尺 內有池泉各一 有軍倉]’이라는 기록으로 보면 조선시대까지 군창으로 이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770년(조선 영조 46년)에 간행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권27 성곽조에는 ‘대모산성은 서쪽 4리에 있는데, 석축으로 둘레는 780척이다. 안에는 연못과 샘이 각각 하나씩 있다. 원래 처음에는 한 할머니가 아들 아홉을 데리고 성을 쌓고 살았다. 많은 곡물을 쌓아놓고 인하여 관곡으로 삼았다하는데, 지금은 (성이) 없어졌다. [大母山城 在西四里 石築 周七百八十尺 內有池泉各一 元初 有老駒 率箕九子 築城居此 多儲穀物 仍爲官穀云 今廢]’라 하여 군창의 역할이 상실되고, 성이 폐기된 사실을 보여주고 있어서 그 시기를 1700년대 이전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홀어머니 산성은 다양한 역사서에 기록되며 순창에서의 역할과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대모산성에 얽힌 또 하나의 이야기

 

역사적 기록은 이처럼 홀어머니산성을 대모 산성으로 부르고 있다. 하지만 순창지역에서는 대모산성을 홀어머니산성이라 부르고 있다. 대모(大母)는 큰 어머니의 뜻을 지니고 있어 한 할미를 흔히 노구, 또는 대모(大母)라고도 칭했는데 여기에서 기인했다는 등 다양한 이야기가 있으나 확인할 수 없다.

설화도 다양하다. 그 중 대표적인 설화는 대모산에 젊어서 과부가 된 양씨 부인이 홀로 살고 있었는데, 같은 동네에 살고 있던 설씨 총각이 양씨 부인을 연모하여 매일 같이 살 것을 청했다. 한다. 절개를 지키고자 재가를 할 생각이 전혀 없던 양씨 부인은 그런 말을 하지 말라며 정색하고 거절했다. 그러나 설씨 총각은 막무가내로 덤벼들었다. 양씨 부인은 그가 보통으로는 설득할 수 없음을 알고 내기를 해서 이긴 사람의 뜻대로 하자는 제안을 한다. 양씨 부인은 대모산에 성을 쌓고, 설씨 총각은 나막신을 신고 한양에 가서 남대문 문패를 떼어 오는 것을 누가 먼저 하는가 내기를 하였다. 만약 설씨 총각이 한양에 갔다 오기 전에 양씨 부인이 성을 다 쌓으면 결혼을 안 할 것이고, 성을 쌓지 못하면 결혼을 허락하기로 한 것이다.

내기는 바로 다음날 시작되었다. 양씨 부인은 치마폭에 돌을 담아 나르며 열심히 성을 쌓았다. 마지막 돌 한 덩이만을 더 올려놓으면 성이 완성되려는 찰나에 한양을 다녀온 설씨 총각이 남대문 문패를 들고 도착하였다. 결국 양씨 부인은 내기에서 지고 말았다. 설씨 총각은 양씨 부인에게 자기와 결혼해 줄 것을 강요했다. 어쩔 수 없이 말을 들어주어야 했던 양씨 부인은 정절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러자 양씨 부인은 돌을 나르던 치마를 뒤집어쓰고 대모산 아래 흐르는 강물에 몸을 날려 빠져 죽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도 시집가는 신부의 신행길은 이곳을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나라 성곽설화에는 거구의 힘센 여성, 또는 노구 할머니가 돌을 들어서 성을 쌓는 축성 설화가 많은데 순창은 힘센 과부와 정절의 개념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1992년에 발견된 순창 성황 대신 사적 현판(중요민속문화재 제238호)에는 홀어미산성의 여신으로 대모(山城大母)가 등장한다. 성황당에는 성황대왕과 성황대부인을 배향하는데 특히 단오절 성황제를 지낼 때는 홀어미산성에서 여성황신을 모셔와 옥천동 성황당에 배위했다는 기록도 있다.


대모산성 삶 속에서 누리는 문화 유산으로

 

순창군에서는 대모산성에 대한 발굴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아쉬운 점은 집수정과 남문지 발굴에 공을 들이고 있으나 쉬이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있어 더 긴 인내가 필요해 보인다는 점이다. 천년에 혼을 간직한 홀어머니 산성의 본 모습을 찾기 위해서는 긴 호흡으로 차근차근 발굴 작업을 진행해야 한다. 순창군은 일단 발굴 작업과 함께 주민들이 보다 더 가깝게 산성을 즐길 수 있도록 삶 속에서 누리는 문화유산으로 정비, 복원할 계획을 세웠다. 이런 계획들이 차근차근 진행돼 천년의 신비 홀어머니 산성이 우리 삶 속으로 다가오길 기대해 본다.

 

이홍식 기자 hslee1820@hanmail.net

<저작권자 © 전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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