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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납북 어부 6명 간첩 누명 벗었다

기사승인 2020.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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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잡이 중 납북됐다가 돌아왔다는 이유로 억울한 옥살이와 평생을 간첩이라는 오명을 쓴 남정길(70)씨 등 공진호 어부 6명이 누명을 벗었다.

광주고법 전주재판부 제1형사부(부장판사 황진구)는 14일 군산 납북어부 재심사건 항소심에서 반공법위반 및 수산업법위반 혐의로 기소된 남씨 등 6명 전원에 대해 원심과 동일한 무죄를 선고했다.

군산에 거주하며 어업에 종사하던 이들은 과거 1967년 5월 경기도 연평도 근해 해상에서 군사분계선을 넘어 황해도 구월골에서 어업을 한 혐의로 기소됐다.

전주지법 군산지원은 1969년 2월 이들에 대해 징역 1년부터 징역 3년의 형을 선고, 일부 인원이 광주고법에 항소했으나 광주고법은 당해 7월 항소기각 판결을 선고했다. 이후 피고인들이 상고권을 포기하거나 상고를 취하함으로써 이들에 대한 형이 최종 확정됐다.

남씨와 망자가 된 피고인 5명의 유족 측은 50여년이 흐른 2018년 7월 “과거 피랍됐다 이후 풀려났으나 국가에서는 불법 감금과 폭력을 앞세워 간첩으로 내몰았다”면서 재심을 청구했다.

전주지법 군산지원은 지난해 7월 “이 사건 공소사실은 범죄의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면서 이들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법원이 기록을 살핀 결과, 이들은 북한에 납북됐다가 1968년 10월 31일 인천항으로 귀환 후 당해 11월 1일 동인천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다 3일 뒤인 11월 4일 군산경찰서로 신병이 인계, 이때부터 구속영장을 발부받지 않은 채 72시간을 넘겨 무허가 여관 등에 감금됐다. 이들에 대한 구속영장은 11월 22일과 28일 등 한 달 뒤에야 발부됐다.

당시 군산경찰서 수사관은 이들에 대해 자백을 강요하면서 구타·물고문·잠 안 재우기 등 강압적으로 조사를 했고, 재심대상 공소사실을 자백하는 내용의 진술서 및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했다. 이들 조사관은 이후 검찰 조사, 공판기일에도 배석해 위협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다.

해당 사건의 2차례 공판기일은 1969년 1월 23일로, 이는 수사기관으로부터 한 달여 불법감금과 가혹행위 등을 당한 상태로 조사를 받고 공소가 제기된 1968년 12월 28일로부터 불과 26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재심을 맡은 전주지법 군산지원은 당시 수사가 적법한 절차에 따라 진행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 경찰에서의 진술뿐만 아니라 검찰 및 판결 법정에서의 진술까지도 임의성이 없었던 건으로 간주했다. 또한 검찰이 이와 같은 임의성에 대한 의문점을 없애는 적극적인 입증이 없었던 것으로 여겼다.

반면 전주지검 군산지청은 “법정에서의 다른 진술은 이들의 의지로 이뤄진 것으로 봐야 한다”면서 재심사건에 대해 항소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수사단계에서 불법구금과 고문 등 가혹 행위가 있었던 만큼, 피고인들이 과거 자백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 자백에 신빙성이 있다고 보긴 힘들다”고 판시했다.

이어 “군사분계선을 넘었다는 것만으로는 반공법위반을 적용할 수 없다”면서 “게다가 피고인들이 어떤 경위로 납북됐는지 위치는 어디인지 등을 비롯해 군사 분계선 어디서 넘어서 조업을 했는지 등 객관적인 증거도 부족하다”고 덧붙였다./권순재기자·aonglhus@

권순재 기자 aonglhus@naver.com

<저작권자 © 전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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