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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구 대접주, 근대 민족운동 역사의 현장 주도

기사승인 2019.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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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동학농민혁명지도자 김덕명의 활동과 원평>교조신원운동 원평집회 주역 백산대회 공동 총참모 담당 인망·경제력 등 뒷받침

   
 

김덕명은 전봉준, 김개남, 최경선, 손화중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을 대표하는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금구지역의 대접주였다. 그는 교조신원운동 과정에서 원평집회의 주역이었으며 1894년 무장기포, 백산대회, 전주성 점령, 원평전투 등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의 활동 지역인 금구 원평은 동학농민전쟁이 잉태됐던 교조신원운동의 집회지이자 1차 봉기의 중심지이며 전주화약 이후 집강소가 설치돼 전라우도를 총괄하던 곳이다. 또한 2차 봉기 후 동학농민군의 주력부대가 총력을 다해 싸웠던 원평전투[구미란 전투]의 현장으로 이곳에서 영호대접주인 김인배를 비롯해 김사엽(사협), 김봉득, 김봉년 등 다수의 동학농민지도자가 배출됐다.
김덕명은 1845년(헌종 11년) 10월 27일 금구 용계(현 김제시 금산면 쌍용리 용계마을)에서 부친 김한기(金漢驥)와 모친 파평 윤씨(坡平尹氏)와의 사이에 장자로 태어났다. 이름은 준상(峻相)이다.
그는 1886년 동학에 입도하고 이듬해에 도소를 설치한다. 이는 전라도에서 동학을 정착시키고 조직을 구축하는데 중요한 요소로서 김덕명의 인망과 경제력 등의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동학 교단 내의 위치와 해월 최시형과의 관계는 1891년 5월 말 해월이 호남 일대를 순회할 때 여름옷 다섯 벌을 지어 주었다거나 최시형이 김덕명의 집으로 와 머물며 포덕하였다는 사실에서 돈독했음을 알 수 있다.
1892년 동학교도들은 10월에는 공주에서, 11월에는 삼례에서 각각 교조신원운동을 추진했는데, 이때 김덕명은 많은 교도들을 동원해 힘을 과시했다. 특히 여러 집회를 통해 성장한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과 함께 삼례집회 이후 무장군수에게 빼앗긴 지목전을 되돌려 받는 등 적극적인 활동도 보여준다.
1893년 3월 10일부터 열린 보은 장내리의 ‘보은집회’에는 2만여 명의 동학교도들이 참가해 힘을 과시했는데, 같은 날 호남에서 열린 금구 ‘원평집회’에는 1만여 명이 참가하기도 했다. 보은집회와 원평집회는 동학의 폭발적인 교세확장과 맞물려 민중운동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스스로 서구의 민회로 규정할 만큼 의식의 성장을 보여주고 있었다. 곧, 척왜양창의의 반외세와 반봉건이 결합된 근대 민족운동 및 근대민족국가 수립의 지향을 추구한 역사의 현장은 바로 원평이었으며 이를 주도한 세력은 바로 김덕명 포였다.
이처럼 원평에 많은 인원이 모일 수 있었던 것은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에서 서남쪽으로 15km 정도의 거리에 위치해 접근성이 좋았으며, 보은으로 가는 전라도 지역 교인들의 중간 거점으로서 지리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변 가까이 금산사와 귀신사가 있어 고통받는 민중들의 왕래가 잦았다. 여기에 원평천과 금산사 사이의 논들에는 예부터 사금(砂金)이 나와 이것을 채취하고자 하는 사람들로 매우 붐볐다.
이러한 환경은 원평천을 중심으로 큰 장이 펼쳐지는 배경이 됐고 이곳 원평장에는 인근에서 생산되는 물산을 거래하기 위해 인구가 모여들었다. 이에 따라 다양한 정보도 제공돼 민심의 동향과 이를 움직일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이곳의 넓은 들은 사람들이 모이는데 적합했고 작은 천도 있어 일시에 물을 사용하기 좋은 입지조건도 가졌다.
이처럼 지리적, 사회·경제적 이점을 가진 원평은 이미 형성된 김덕명 포의 세력을 기반으로 힘을 과시하는 장소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적합했다. 1893년 전라감사 김문현이 전라감사 제수를 받고 입시 했을 때 고종은 “금구에 동학당이 가장 많다고 하는데 먼저 그 소굴을 소탕하라” 하자 김문현은 “전주로부터 30리가량 떨어져 있는 금구 원평에 과연 동학당들이 많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한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금구 원평을 거점으로 성장한 김덕명은 무장기포 이후 백산대회에서 오시영과 함께 총참모를 담당한다. 그의 역할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참모라는 직책에서 조직운영 및 기타 제반 사항을 총괄하는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김덕명은 당시 50세로 전봉준보다 10세 연상으로 당시로는 적지 않은 나이였으며 전투 현장에 있었다는 기사나 동학농민군의 진군 과정에서 한 번도 거명되지 않은 사실에서 유추할 수 있다.
1차 봉기 후 7월 장두재가 동학농민군의 기포를 촉구하는 편지를 김덕명에게 보냈다는 점에서 김덕명은 여전히 원평에서 세를 과시하고 있었으며 9월 재봉기 이후에도 민막을 해소하며 동학농민군을 지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논산 황화대전투에서 패한 전봉준은 11월 23일 금구 원평으로 후퇴해 이곳에서 전의를 가다듬게 되는데 그 이유는 전술한 원평지역이 가지는 지리적 특수성과 김덕명 포라는 배경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원평에 주둔하며 재기를 노리던 동학농민군은 11월 25일 원평 구미란에서 경군과 일본군 연합군과 맞섰지만 농민군 37명이 전사하는 참담한 결과를 맞이했다. 이때의 처참한 상황을 마을 원로들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당시 숨진 동학농민군의 시신은 한 달 가까이 거두지 않아 썩어 팔과 다리를 개가 물고 다니자 섣달그믐이 되어서야 주민들이 구미란 뒷산에 몇십 구씩 묻었으며, 당시 40여 호에 이르던 구미란 마을은 두 가구를 제외하고 모두 불에 탔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서도 벽장이나 우물 속에 숨었던 농민군이 관군에게 넘겨지는 수난을 당했고 지금도 쓰이는 “이삼대 쓰러지듯이 쓰러졌다” 혹은 “너에게 죽으려면 갑오년에 유탄에 맞아 죽었다”라는 말은 당시의 상황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자신이 어렸을 적 마을 인근에는 연환이 남아 엿과 바꿔먹었다고도 술회하고 있다.
김덕명은 이은 태인전투에서도 패한 후 전봉준과 헤어져 집안의 재실이 있는 안정사 절골로 피신하던 중 1895년 1월 1일 수성군의 급습으로 체포됐다. 3월 29일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 성두환 등과 함께 교형을 선도 받고 죽음을 맞이했다. 동생 인상 역시 관군과 싸우다가 1월 27일 체포돼 사형됐다.
그의 시신은 친지들에 의해 원평으로 옮겨져 살아남은 두 아들에 의해 안정사 절골에 안장됐다. 전봉준, 손화중 등 처형된 다른 지도자들과 달리 시신을 거둘 수 있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안치된 시신은 2008년 5월 후손들에 의해 파묘돼 화장한 후 현재 삼봉리 납골당에 모셔졌다. 동학농민군 지도자 중 유일한 실묘였기에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그의 활동과 평가는 “거괴 금구현 용계동에 사는 김덕명을 잡아 대령하였습니다. 이놈은 원평점에 도소를 크게 설치하고 사사로이 공전·공곡을 받아들이고 평민을 침탈한 자입니다.”(『순무선봉진등록』 1895년 1월 8일) , “금구지방에서 무리를 모아 관고의 군물을 약탈하고 민간의 돈과 곡식을 빼앗았으며, 관정(官庭)이나 마을에서 소요를 일으켜 더욱 혼란스럽게 하여 분수와 의리를 범하는 것이 끝이 없다.”(판결문) 라는 내용에서 확인된다.
관 기록인 위 기사는 김덕명은 원평에서 대도소를 설치하고 군량미 조달을 위한 활동을 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거괴’라는 표현이나 그의 압송을 위해 장교를 포함한 나졸과 수성군까지 동원한 사실은 동학농민혁명에서 그의 위치를 엿볼 수 있다.
원평에는 원평집회가 열렸던 원평장터, 김덕명 생가터, 전봉준의 부친 전창혁 유허지, 돈 많은 백정 동록개가 “신분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며 기증했다는 집강소, 구미란 전투지(금산면 용호리) 등의 유적지가 당시를 말해주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지도자 김덕명의 활동과 원평

                                                                      정성미
김덕명은 전봉준, 김개남, 최경선, 손화중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을 대표하는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금구지역의 대접주였다. 그는 교조신원운동 과정에서 원평집회의 주역이었으며 1894년 무장기포, 백산대회, 전주성 점령, 원평전투 등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의 활동 지역인 금구 원평은 동학농민전쟁이 잉태되었던 교조신원운동의 집회지이자 1차 봉기의 중심지이며 전주화약 이후 집강소가 설치되어 전라우도를 총괄하던 곳이다. 또한 2차 봉기 후 동학농민군의 주력부대가 총력을 다해 싸웠던 원평전투[구미란 전투]의 현장으로 이곳에서 영호대접주인 김인배를 비롯하여 김사엽(사협), 김봉득, 김봉년 등 다수의 동학농민지도자가 배출되었다.
김덕명은 1845년(헌종 11년) 10월 27일 금구 용계(현 김제시 금산면 쌍용리 용계마을)에서 부친 김한기(金漢驥)와 모친 파평 윤씨(坡平尹氏)와의 사이에 장자로 태어났다. 이름은 준상(峻相)이다.
그는 1886년 동학에 입도하고 이듬해에 도소를 설치한다. 이는 전라도에서 동학을 정착시키고 조직을 구축하는데 중요한 요소로서 김덕명의 인망과 경제력 등의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동학 교단 내의 위치와 해월 최시형과의 관계는 1891년 5월 말 해월이 호남 일대를 순회할 때 여름옷 다섯 벌을 지어 주었다거나 최시형이 김덕명의 집으로 와 머물며 포덕하였다는 사실에서 돈독하였음을 알 수 있다.
1892년 동학교도들은 10월에는 공주에서, 11월에는 삼례에서 각각 교조신원운동을 추진하였는데 이때 김덕명은 많은 교도들을 동원하여 힘을 과시하였다. 특히 여러 집회를 통해 성장한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과 함께 삼례집회 이후 무장군수에게 빼앗긴 지목전을 되돌려 받는 등 적극적인 활동도 보여준다.
1893년 3월 10일부터 열린 보은 장내리의 ‘보은집회’에는 2만여 명의 동학교도들이 참가하여 힘을 과시하였는데 같은 날 호남에서 열린 금구 ‘원평집회’에는 1만여 명이 참가하기도 하였다. 보은집회와 원평집회는 동학의 폭발적인 교세확장과 맞물려 민중운동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스스로 서구의 민회로 규정할 만큼 의식의 성장을 보여주고 있었다. 곧, 척왜양창의의 반외세와 반봉건이 결합된 근대 민족운동 및 근대민족국가 수립의 지향을 추구한 역사의 현장은 바로 원평이었으며 이를 주도한 세력은 바로 김덕명 포였다.
이처럼 원평에 많은 인원이 모일 수 있었던 것은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에서 서남쪽으로 15km 정도의 거리에 위치하여 접근성이 좋았으며 보은으로 가는 전라도 지역 교인들의 중간 거점으로서 지리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변 가까이 금산사와 귀신사가 있어 고통받는 민중들의 왕래가 잦았다. 여기에 원평천과 금산사 사이의 논들에는 예부터 사금(砂金)이 나와 이것을 채취하고자 하는 사람들로 매우 붐볐다.
이러한 환경은 원평천을 중심으로 큰 장이 펼쳐지는 배경이 되었고 이곳 원평장에는 인근에서 생산되는 물산을 거래하기 위해 인구가 모여들었다. 이에 따라 다양한 정보도 제공되어 민심의 동향과 이를 움직일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이곳의 넓은 들은 사람들이 모이는데 적합했고 작은 천도 있어 일시에 물을 사용하기 좋은 입지조건도 가졌다.
이처럼 지리적, 사회·경제적 이점을 가진 원평은 이미 형성된 김덕명 포의 세력을 기반으로 힘을 과시하는 장소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하였다. 1893년 전라감사 김문현이 전라감사 제수를 받고 입시 했을 때 고종은 “금구에 동학당이 가장 많다고 하는데 먼저 그 소굴을 소탕하라” 하자 김문현은 “전주로부터 30리가량 떨어져 있는 금구 원평에 과연 동학당들이 많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한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금구 원평을 거점으로 성장한 김덕명은 무장기포 이후 백산대회에서 오시영과 함께 총참모를 담당한다. 그의 역할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참모라는 직책에서 조직운영 및 기타 제반 사항을 총괄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김덕명은 당시 50세로 전봉준보다 10세 연상으로 당시로는 적지 않은 나이였으며 전투 현장에 있었다는 기사나 동학농민군의 진군 과정에서 한 번도 거명되지 않은 사실에서 유추할 수 있다.
1차 봉기 후 7월 장두재가 동학농민군의 기포를 촉구하는 편지를 김덕명에게 보냈다는 점에서 김덕명은 여전히 원평에서 세를 과시하고 있었으며 9월 재봉기 이후에도 민막을 해소하며 동학농민군을 지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논산 황화대전투에서 패한 전봉준은 11월 23일 금구 원평으로 후퇴하여 이곳에서 전의를 가다듬게 되는데 그 이유는 전술한 원평지역이 가지는 지리적 특수성과 김덕명 포라는 배경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원평에 주둔하며 재기를 노리던 동학농민군은 11월 25일 원평 구미란에서 경군과 일본군 연합군과 맞섰지만 농민군 37명이 전사하는 참담한 결과를 맞이하였다. 이때의 처참한 상황을 마을 원로들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당시 숨진 동학농민군의 시신은 한 달 가까이 거두지 않아 썩어 팔과 다리를 개가 물고 다니자 섣달그믐이 되어서야 주민들이 구미란 뒷산에 몇십 구씩 묻었으며, 당시 40여 호에 이르던 구미란 마을은 두 가구를 제외하고 모두 불에 탔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서도 벽장이나 우물 속에 숨었던 농민군이 관군에게 넘겨지는 수난을 당했고 지금도 쓰이는 “이삼대 쓰러지듯이 쓰러졌다” 혹은 “너에게 죽으려면 갑오년에 유탄에 맞아 죽었다”라는 말은 당시의 상황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자신이 어렸을 적 마을 인근에는 연환이 남아 엿과 바꿔먹었다고도 술회하고 있다.
김덕명은 이은 태인전투에서도 패한 후 전봉준과 헤어져 집안의 재실이 있는 안정사 절골로 피신하던 중 1895년 1월 1일 수성군의 급습으로 체포되었다. 3월 29일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 성두환 등과 함께 교형을 선도 받고 죽음을 맞이하였다. 동생 인상 역시 관군과 싸우다가 1월 27일 체포되어 사형되었다.
그의 시신은 친지들에 의하여 원평으로 옮겨져 살아남은 두 아들에 의해 안정사 절골에 안장되었다. 전봉준, 손화중 등 처형된 다른 지도자들과 달리 시신을 거둘 수 있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안치된 시신은 2008년 5월 후손들에 의해 파묘되어 화장한 후 현재 삼봉리 납골당에 모셔졌다. 동학농민군 지도자 중 유일한 실묘이었기에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그의 활동과 평가는 “거괴 금구현 용계동에 사는 김덕명을 잡아 대령하였습니다. 이놈은 원평점에 도소를 크게 설치하고 사사로이 공전·공곡을 받아들이고 평민을 침탈한 자입니다.”(『순무선봉진등록』 1895년 1월 8일) , “금구지방에서 무리를 모아 관고의 군물을 약탈하고 민간의 돈과 곡식을 빼앗았으며, 관정(官庭)이나 마을에서 소요를 일으켜 더욱 혼란스럽게 하여 분수와 의리를 범하는 것이 끝이 없다.”(판결문) 라는 내용에서 확인된다.
관 기록인 위 기사는 김덕명은 원평에서 대도소를 설치하고 군량미 조달을 위한 활동을 하였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거괴’라는 표현이나 그의 압송을 위해 장교를 포함한 나졸과 수성군까지 동원한 사실은 동학농민혁명에서 그의 위치를 엿볼 수 있다.
원평에는 원평집회가 열렸던 원평장터, 김덕명 생가터, 전봉준의 부친 전창혁 유허지, 돈 많은 백정 동록개가 “신분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며 기증하였다는 집강소, 구미란 전투지(금산면 용호리) 등의 유적지가 당시를 말해주고 있다.

전라일보 webmaster@jeolla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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