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장수군는 이름부터 길 장(長)에 물 수(水)자가 합쳐진 곳이다.
긴 물이라는 뜻도 있겠지만 뛰어난 물맛이라는 뜻도 내포돼 있어 이미 우리 조상들은 장수의 깊은 물맛을 알고 지명에 새겨넣었는지도 모른다.
장수군을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단연 사과일 것이다. 그리고 절개의 상징인 논개도 기억 한켠을 차지하고 있을텐데 이제는 거기에 수제맥주를 포함시켜야 할 지 모르겠다.
조용하고 고즈넉한 장수가 좋아 연고도 없이 그대로 정착해 맥주를 빚으며 인생 2막을 열어가는 '장수 583 양조장'의 전경 대표를 만나봤다. /편집자주

보통 귀농을 꿈꾸는 사람들이 흔히 선택하는 답안지는 고향 또는 연고가 있는 곳에 정착하는 것이다. 그 편이 실패의 확률이 적고 마음의 안정이 되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전 대표는 달랐다. 달라야 살아남는다는 것을 이미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수제맥주계의 후발주자'라고 겸손하게 소개하는 전 대표는 서울에서 사회복지사로 오랜기간 활동 후 퇴직즈음 주변을 둘러보니 이미 수도권은 수제맥주산업이 포화상태에 이르렀음을 알게됐다.
하지만 그즈음 마침 수제맥주에 관련된 규제도 느슨해지면서 이때를 놓치면 영영 원하는 일을 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생각을 180도 뒤집었다. 
"차라리 시골 오지로 들어가보는 건 어떨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역발상이죠. 처음엔 스스로도 확신을 갖지 못했지만 오히려 도전하고 나니 잘했다는 생각만 듭니다."
수제맥주산업 기반이 그나마 잡혀있다는 강릉이나 제천도 열심히 다녀봤지만 마음을 끌진 못했다. 전 대표가 꿈꾼 것은 '진짜 시골에 있는 아주 작은 양조장'인데 그 색깔에 맞는 지역을 찾는건 쉽지 않았다.
그렇게 사전조사를 위해 돌아다닌 끝에 장수에 다다랐다. 전북은 연고도 전혀 없어 시작하게 된다면 맨 땅에 헤딩하는 마음으로 도전해야 했지만 계속 마음이 끌렸다. 여기라면 꿈을 펼쳐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장수는 알면 알수록 매력적이었다. 한국에 아직도 이런 오지가 있나 싶을정도로 완연한 시골 분위기에 마침 칡즙 등을 생산해내던 폐공장이 인근 관광지 쪽에 위치해 있어 적합한 가격에 매입할 수 있었다.
장수 자체가 고원지대라 수원지도 해발 500m 근처고, 마침 폐공장 주소도 583-3이었다. 묘하게 어우러지는 두 관계를 잘 살리고 싶어 사업장 이름을 '583 양조장'이라고 지었다.
그렇다고 힘든 게 없었던 건 아니다. 역시나 폐공장을 멋진 브루어리(맥주 공장)로 만드는 일이 급선무였다. 10년 넘게 방치되어 있던 탓에 온갖 쓰레기와 세월의 흔적이 뭉쳐있었다.
수도권처럼 멋진 인테리어를 하고 싶어도 그런 인력 자체를 구하는 게 어려웠다. 방법은 하나, 그냥 귀농을 결심한 사람들과 힘을 합쳐 하나하나 고쳐나가는 것 뿐이었다.
"벽에 붙은 벽돌 보이시죠? 하나하나 손수 붙인겁니다. 붙이다가 이사랑 다투기도 했을만큼 굉장히 힘든 작업이었죠."
그렇게 애정을 가지고 꾸민 브루어리는 그야말로 장수에서는 그간 볼 수 없었던 독특하고도 세련된 공간으로 변모했다. 칡 찌꺼기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과거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건물을 깔끔하게 단장했으니 이제는 본격적인 맥주생산시설이 필요했다. 때마침 농업기술센터에서 실시하는 귀농귀촌 수업을 알게 돼 알찬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사업과 관련된 전문교육도 틈틈히 병행해야 했다. 설비도 설비지만 각종 집기류를 마련하는 일도 상당한 문제였다.
이 문제를 해결해 준 것 역시 전북농업기술원이었다. 583 양조장의 가능성을 알아본 기술원이 예산을 집행하면서 집기 구비에 드는 비용과 수고로움을 한결 덜 수 있었다.
"기술센터교육이 없었다면 사업 초반부터 휘청였을 겁니다. 귀농 후 이뤄진 SNS 교육 등을 받으면서 공장 오픈 1년 전부터 매일 1개의 글을 블로그에 올리며 사람들에게 천천히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와인은 '빈티지'로 갈리지만 맥주는 '스타일'로 갈린다는 전 대표는 가장 자신있는 맥주 스타일로 '페일에일'을 꼽았다.
부드러운 맛이 특징인 '페일에일'은 우리가 흔히 맥주집에서 접하는 상업맥주의 대표격인 '라거' 보다는 쓴맛이 강하지만 583 양조장에서 만드는 페일에일은 마냥 쓰기 보다는 맥주의 원료인 '홉'이 가진 깊은 맛을 그대로 담고 있어 손님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다고.
매장에 와서만 즐길 수 있는 점이 아쉽다는 고객들의 반응을 살피다 이제는 캔에 담아 캔맥주로 팔기 시작했다. 최근엔 전주에서 열린 치맥&가맥 페스티벌에도 참여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장수표 수제맥주'를 선보이기도 했다.
전 대표의 꿈은 단순히 맥주를 생산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우리 땅, 그것도 장수에서 나고 자란 '홉'으로 진짜 장수만의 수제맥주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 궁극적 목표라고 말한다.
이미 군산에선 수제맥주의 가능성을 엿보고 본격적으로 맥아를 재배하고 있으며 부안을 비롯한 제천과 홍천 등지에선 맥주의 맛을 결정짓는 국내산 홉이 재배되고 있는 실정이다.
전 대표가 보기엔 오히려 장수가 홉 재배의 최적지(고지대, 서늘한 기후 등)이기 때문에 수제맥주 산업을 선도할 충분한 저력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직 지자체의 적극적 태도가 뒷받침 되지 않아 조금은 아쉽다고 말한다.
"홉은 고소득 대체 작물로서도 충분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어느곳 보다도 장수가 그 선두주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이제는 제법 입소문이 나서 장수까지 먼 길을 나서 전 대표에게 맥주를 배워가는 사람도 점점 늘고 있단다. 이 기세를 몰아 내년 벚꽃잎이 휘날리는 어느 날에 장수 군민들과, 그리고 장수의 수제맥주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함께하는 맥주 축제를 꿈꾼다는 전 대표의 눈빛엔 신바람이 감돈다. /홍민희기자·minihong2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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