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은 마한 맹주국인 목지국이었다

2-마한

익산은 사람이 모여 살기 좋은 곳이라는 지리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익산의 북쪽에는 금강이, 남쪽에는 만경강이 흐르고 있다. 이 강에서 뻗어 나온 물줄기를 지금은 찾아볼 수 없지만, 익산 지역에 남아 있는 옛 지명이나 고고학적 자료를 살펴보면, 금강의 물은 금마 일대까지, 만경강 물은 왕궁 일대까지 들어왔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물줄기는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거나 다른 곳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통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금강과 만경강 사이에는 ‘옥야’로 불릴 만큼 비옥하고 너른 들이 펼쳐져 있어 한 국가를 세우고 남을 만큼 풍요로웠던 곳이다.
이처럼 익산이야말로 사람이 모이고, 문화가 움트고, 성장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익산은 위만에게 쫓긴 고조선 준왕이 새로운 터전으로 삼았을-설령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 할지라도 후대 사람들이 그렇게 인식할-정도의 땅이었다. 또한 그러한 땅이었기에 백제 무왕 역시 익산에서 백제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자 하였으며, 견훤이 후백제 창건을 꿈꿀 수 있었을 것이다.’<국립전주박물관 ‘전북의 역사문물전-익산’ 2013>
또한 금강과 만경강 사이에 위치한 익산은 최근 발굴조사를 통해 구석기문화와 신석기문화가 발전한 지역으로 밝혀지고 있다.
구석기 문화 주요 유적으로는 여산면 원수리 신막유적을 비롯해서 다송리유적, 서두리유적, 쌍정리유적이 있으며 신석기 유적으로는 웅포리유적과 신용리 갓점유적이 대표적이다.
청동기시대 주요 유적으로 영등동, 부송동, 다송리, 석천리유적 등이 있다.
이들 유적의 유물을 살펴 볼 때 고고학적으로 익산지역의 청동기문화는 중국, 한반도 서북부지역(대동강유역)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렇듯 익산지역과 중국, 대동강 지역의 연결은 고조선 준왕의 새 터전과 이어진다.
<후한서> 동이열전에는 ‘과거에 조선왕 준왕이 위만에게 패하여 자신의 남은 무리 수천명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마한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스스로 한왕이 되었다, 준의 후손이 절멸하자 마한사람이 다시 자립하여 진왕이 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또 <제왕운기>에는 ‘이름은 준인데 다른 사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백성도 떠나니 928년 동안 다스린 것인데, 기자의 유풍이 찬연이 전하였다. 준은 곧 금마군으로 옮겨 거주해서 도읍을 세워서 또 다시 임금이 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밖에 <고려사>, <세종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서도 고조선 준왕이 정착한 곳을 금마(金馬)로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들이 준왕의 남래지가 바로 청동기 문화의 중심지인 익산임과 동사에 마한의 중심지역으로 비정되는 이유다.
마한은 기원전 2세기 이전에 성립돼 기원후 3세기까지 경기·충청·전라도 지방에 분포한 54개의 소국(小國)을 가리킨다.
이 가운데 목지국(目支國)은 마한 소국 연맹체(小國聯盟體)의 중심 세력이었다. 특히 목지국 진왕은 삼한의 총왕적인 위상을 지녔다는 분석도 있다.
주목되는 것은 목지국의 위치다. 충남 직산, 예산과 아산만 일대가 비정되기도 하지만 금강유역의 익산지역이 최근의 청동기 유물 발굴과 사료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목지국일 가능성으로 주목받고 있다.
‘8월에 마한에 사신을 보내 도읍을 옮긴다는 것을 알렸다. 마침내 국토의 영역을 확정하였으니 북으로는 패하(예성강), 남으로는 웅천(熊川)이 경계이며 서로는 큰 바다에 닿았고 동으로는 주양(춘천)에 이르렀다.’<<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왕 13년조>
여기에서 주목해할 부분은 시조왕 13년의 정확한 시기와 웅천의 위치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문화유적학과 교수는 지난해 8월 ‘전라북도 정체성 확립 학술세미나’에서 <일본서기>에 기록돼 있는 백제의 마한 경략 기사는 웅천의 위치를 가늠해 주는 실마리가 된다고 밝힌바 있다.
‘그리고 비자발·남가라·록국·안라·다라·탁순·가라의 7국을 평정하였다. 이에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에 이르러 남만의 침미다례를 도륙하여 백제에 내려주었다. 이에 그 왕 초고 및 왕자 근수 역시 군대를 이끌고 와서 모였다. 그때 ‘비리벽중포미지반고사읍(比利?中布彌支半古四邑)’이 자연 항복하였다. 이에 백제왕 등이 함께 의류촌(지금 ‘주류수기’를 말한다)에서 만나 서로 기쁨을 나누었다.…(중략) 백제국에 이르러 벽지산(?支山)에 올라 맹세하였다. 다시 고사산(古沙山)에 올랐다‘
이 교수에 따르면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자연 항복했다는 지명이다.
‘비리는 부안의 보안, 벽중은 김제, 포미는 정읍, 지반은 부안, 고사는 고부로 새롭게 비정된다. 게다가 의류촌은 일명 주류수기라고 하므로 주류성을 가리킨다. 나아가 이는 주류성의 위치를 부안으로 비정한 견해와도 무리없이 이어진다. 이러한 비정은 벽지산과 고사산이 벽중(김제)과 고사(고부)로 각각 비정되는 데서도 뒷받침 된다. 따라서 여기서 보이는 고해진만 전남 강진에 비정될 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금강 이남부터 노령산맥 이북지역에 해당되고 있다. 따라서 마한경략이전 백제의 남쪽 경계는 금강이다. 금강을 남쪽 경계로 하는 백제의 영역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왕 13년조 웅천을 남계로 하는 기사와도 연결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시조왕 13년조 기사는 근초고왕이 마한을 실질적으로 멸망시킨 4세기 후반의 기록이며 이 기록에 따르면 백제가 금강을 넘어 전북지역과 전남지역의 마한 세력을 멸망시켰다는 것을 밝혀, 웅천이 금강임을 입증하고 있다.
다산 정약용도 <삼국사기>를 토대로 ‘마한은 지금의 익산이다. 총왕(總王-마한의 진왕)이 도읍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한사(漢史)에서 목지국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익산을 가리킨다.…당시에 마한 땅이 가장 넓어 북쪽으로는 웅진으로부터 남쪽으로는 바닷가에 닿았다’고 갈파한 바 있다.
이도학 교수는 “고조선 준왕의 남래지 인데다가 청동기 문명이 꽃을 피웠던 곳이 익산이었다. 그러한 익산이 목지국의 거점이었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에 속한다.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모태인 동시에 그 전 단계가 삼한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삼한의 총왕이 거점으로 삼았던 익산은 백제 때도 중시될 수 밖에 없었다”고 강조했다.
/특별취재반

▲마한박물관
익산 금마 서동공원에 세워져 있다.전시공간은 세 파트로 구분돼 있다.
△마한의 성립 배경(익산의 구석기~초기철기시대 유물 전시)= 익산의 구석기유적 출토 유물 및 마한 성립의 바탕이 되는 익산의 청동기· 초기철기시대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익산 서두리 출토 슴베찌르개는 한반도에서 최초로 확인된 것이며, 오룡리 출토 청동거울은 한반도에서 출토 예를 찾을 수 없는 귀한 유물이다.
△마한의 성립과 생활문화(마한의 집터와 무덤 출토 유물 전시)=마한의 영역과 시기, 위치에 대해 소개하고, 마한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마한의 토기와 생산 도구, 유리옥을 만들던 거푸집, 옥 목걸이, 새모양토기, 대형 옹관 등을 통해 익산에서 꽃피웠던 마한의 생활문화를 엿볼 수 있다.
△마한에서 백제로의 변화(모현동 묵동유적 출토 유물과 기증유물 전시)=마한에서 백제로 변화되는 과정을 집의 구조, 집 내부시설의 변화, 토기, 무덤구조의 변화 등 발굴성과를 통해서 살펴보는 코너이다. 특히 묵동 삼국 시대 분구묘에서 출토된 오각형 고리자루칼과 토기를 통해 묘제는 마한의 전통을 잇고 있지만, 껴묻거리는 백제의 것으로 바뀌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예성강
황해북도 수안군 언진산에서 발원하여 황해남도 배천군과 개성시 개풍군 사이에서 강화만에 흘러드는 강. 고려 시대의 국제 무역항인 벽란도가 하류에 있었다.
▲노령산맥
추풍령 부근에서 남서 방향으로 전주시와 순창군의 중간을 지나 곰티재·모악산·내장산을 거쳐 정읍∼장성 간의 노령 등을 일으키고 무안반도에 이르는 산맥.
▲침미다례
마한(馬韓)에 속하였던 초기국가. 신미국(新彌國). 서남해안 20여 소국의 맹주 역할을 하면서 영산강 유역에 지역연맹체를 형성한 것으로 파악된다. 전라남도 해남군 현산면의 백포만 일대로 비정되고 있다.

 

저작권자 © 전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